그렇게 내 정신적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는 오랜 기간 어머니께 무시와 비교를 많이 당했다. 그런 어머니는 중학생 때부터 워낙 맹했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고 정신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이때부터 경기도에 위치한 정신과 의원에서 상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자아가 생겼던 약 11년 전 고등학생 1학년 2학기, 여전히 자아가 생기게 되었던 원인이나 계기는 모르지만, 그 시기만큼은 확실하다. 자아가 생겼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라면 나는 그때가 돼서야 처음으로 '나'라는 개념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생각하는 법도 모른 채, 말 그대로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바다에 포함된 하나의 물방울처럼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도, 느끼려는 의지도 없었다. 나는 결혼도 안(못) 할 거고 아이도 갖지 않을(못 할) 거지만, 만약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인지할 수 있도록 자아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다.
나는 항상 혼자서 겉도는 학생이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우리 지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남학생 고등학교였는데, 나는 운 좋게 미달로 입학했었다. 그런 우리 학교의 시스템은 당연히 밤 10시까지의 야간 자율 학습 시간까지가 기본이었고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든 학생이 그 시스템을 따랐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고 못 했다. 이 시기에 진단받았던 증상 중 하나는 스트레스의 신체화였고, 이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체가 실제로 악화된다는 뜻이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당시에는 항상 무거운 두통에 짓눌렸고 혈압은 측정할 때마다 고혈압이었다. 쉽게 말해서 싫어하는 것은 못 한다는 것인데, 내 의식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 무의식이 판단하기 때문에 내 의지로 버텨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 증상이 가장 심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교실에 있는 것조차 어려워서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내 책상만 복도로 빼놓고 수업 시간을 포함해서 온종일 교실 밖에서 생활할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그랬었다.
다시 1학년으로 돌아오면, 자아를 조금씩 확립해 가던 중 이때부터 검색이라는 행동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넘쳐나는 호기심에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학교 수업 시간에는 늘 접어들고 다니던 A4용지 종이를 교과서 위에 올려두고 단어의 정의부터 구체적인 질문까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적었다. 그 후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면 곧장 PC방으로 가, 음악을 틀어놓고 몇 개의 인터넷 검색창을 띄운 뒤, 검색을 통해서 적어놓았던 모든 궁금함에 대해 스스로 답해줬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생각이라는 행동에 폭발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남기기 위해 기록이라는 행동도 처음으로 하게 되었으며 기록하는 습관은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약 11년간 꾸준히 이어졌다.
참고로 5곳의 PC방을 다녔었는데 한 번은 모든 곳의 PC방 사장님께 내가 사용한 금액과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본 적이 있었다. 모든 곳을 합쳐보니 1년 동안 약 350만 원을 사용했었고 학교에 있었던 시간보다 PC방에 있었던 시간이 2배 이상 됐었다. 나는 딱히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PC방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학교도 집도 싫다 보니 그나마 혼자 있을 수 있었던 PC방을 자주 가게 됐었다. PC방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양옆에 세워진 칸막이가 날 보호해 줬고 내게 음악을 들려주고 세상을 보여주던 모니터가 내 숨통을 트여주던 유일한 창문이 됐었다.
그런 식으로 생활하다 보니 고등학생 2학년 때의 나는 주변 학생들에게 신기한 존재가 됐었다. 다들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혼자서 자유로운 한량처럼 지내니 말이다. 당시 내 옆자리였던 전교 7등이 나한테 내가 부럽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참 부러웠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자아가 생긴 뒤부터 지금까지 화장을 하고 다닌다. 아마 그걸 가장 신기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날 게이라고 생각한 애들도 적지 않았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게이는 아니다. 고등학생 3학년 때는 다들 수능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말 그대로 나 혼자만 공부 안 하고 놀았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비행을 저지르거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있어서, 자식으로서는 지독하게도 공부를 안 하던 불효자였다. 지금은 굉장히 좋은 사이로 잘 지내지만, 내가 17살일 때부터 25살일 때까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극도로 불안정했던 나를 끝없는 인내로 기다려 주시고 늘 손을 내밀어 주셨던 아버지, 나는 그 손을, 그 믿음을 잘라먹었었다. 당시 아버지는 나를 믿고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용돈을 매우 풍족하게 주셨었는데 난 그 돈을 내 PC방의 자금으로 사용했었다. 자아가 처음 생기고서 내 위에는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오만방자했던 시기에,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예민해져 있던 나를 가시에 찔려가면서까지 품어주시려 했던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당시의 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부정했을 때였는데, 부모님의 은혜로 얹혀사는 주제에 내 위에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말라고 내게 내려주셨던 동아줄, 내가 잡고 있던 동아줄의 반대편은 노쇠해 가시는 부모님께서 힘껏 붙들고 계셨고 줄의 끝은 부모님의 목에 묶여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목에 묶어놓으신 거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매달렸었다.
그리고 가장 염치없이 흔들렸던 때라면 3학년. 난 수능을 보고 자살할 생각이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100배는 더 부족했을 그때의 나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수류탄의 안전핀 제거를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때만 해도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싫었었고, 내가 싫어하는 부모님의 소중한 나를 빼앗는다는 얄팍한 복수극을 그렸었는데.
그날도 내가 뭔가 잘못한 날이었다. 피부가 긴장될 정도로 추웠던 날, 학교 주변을 순찰하시던 학교 선생님께 학생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교복 재킷과 넥타이를 벗고 와이셔츠만 입은 채 정규 수업이 끝나고 PC방으로 가는 길. 내 여러 잘못에 눌려 고개도 눈도 바닥을 향했다. 밤이 되면서 추위는 더욱 매서워졌고, 청소년은 PC방에서 10시를 넘길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맞을 만한 일이 많이 쌓여서 이날은 옷걸이가 아니라 대걸레 봉으로 맞았다. 많이 아팠는지, 도중에 나는 때리지 말라며 봉을 잡으면서 차라리 나를 버리라고 했었다. 그때는 부모님께 해서는 안 될 말들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렇다고 욕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나 엉망이고 구제 불능이니까 차라리 나를 버리라고 죽겠다고. 그랬더니 어머니는 살면서 처음으로 펑펑 우시면서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 수 있겠냐고 하셨고 당시 엄마는 나를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겐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건가 하며 조금은 믿어보게 되었다. 그래도 매는 너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