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오후 4시 40분은 봉인의 시간이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며 최근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는 중,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다. 교사는 공무원이고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다. 당시 교감 선생님을 준비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초과 근무로 늦게 퇴근하시곤 하셨지만, 그런 것 없이 일반적인 초등학교 교사이신 어머니의 경우는 오후 4시 30분이 땡 되면 무조건 퇴근. 그 말은 내게 있어서 봉인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오후 4시가 되면 그때부터 틈틈이 벽걸이 시계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오후 4시 10분이 되면 집안에 어지럽혀져 있지 않은지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오후 4시 20분이 되면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며 본격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한다. 오후 4시 30분이 되면 내 방 책상에 앉고 구몬학습 책을 펼쳐 놓은 뒤에 현관문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운다. 이제부터는 언제라도 들어오실 수 있다는 뜻이다. 집과 학교의 거리는 도보로 대략 10분, 오후 4시 40분이 되자 현관문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어머니께서 들어오시는 순간, 나는 봉인됐다.
나는 부모님의 퇴근을 기대하며 기다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오면 나만의 혼자라는 방어벽이 붕괴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의 자녀인 데다 형제는 6살 터울이어서 보통은 내가 외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늘 혼자가 좋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려서부터 사람이 싫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좋아할 능력이 못 되어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을 못 하는 자가 물을 무서워하듯. 내 인지 범위 내에 타인이 있다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었기에 별다른 악의 없이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냥 늘 싫었다. 그리고 그 범주에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번은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셨던 아버지께서 본인이 미국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들을 거실 바닥에 펼쳐놓고는 내게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보라고 하셨었는데 내가 고른 사진들은 모두 사람이 찍히지 않은 풍경이나 사물의 사진들이어서 아버지께서 신기하게 생각하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수련회에 가게 되었을 때 다들 롤링 페이퍼에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을 적고 그리며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나는 그런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난 그런 느낌의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어머니께서 다니던 초등학교와 같았다. 동문이 아니라 동시에 같이 다녔다는 뜻이다, 나는 학생으로서 어머니는 선생님으로서.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부모님이 선생님으로 계셔서 좋은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준비물을 실수로 챙기지 못했을 때, 엄마 반에 가면 혼나긴 하더라도 모든 준비물이 다 있어서 바로 제공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항상 "엄마 반으로 가면 돼요?", "엄마 반으로 갈게요." 이랬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참 신기한 표현이다. '엄마 반'. 마치 학교에 내 방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당시는 선생님이 촌지를 받던 시절에서 지나갔지만, 선물은 여전히 많이 받았었다. 어머니께서 현장학습을 다녀오시는 날이면 열 개도 넘는 도시락과 음료수, 간식거리를 선물로 받아오셨다. 가장 화려했던 날은 단연코 스승의 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승의 날에는 어머니께서 직접 사용하실 만큼의 값진 선물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내게 떨어지는 것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날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데이'가 들어가는 날. 화이트 데이나 빼빼로 데이를 비롯하여 '데이'만 들어가면 선생님 책상에 다 올려놓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선물이 들어왔고 어머니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모든 선물은 사실상 내 것이었다. 빼빼로 데이에 빼빼로를 가장 많이 받은 학생은 아니었지만 아마 빼빼로를 가장 많이 먹은 학생은 나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데이'는 엄마 반에 가고 싶어서 빨리 수업이 끝났으면 하는 몇 안 되는 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좋은 날도 수없이 많은 그렇지 못한 날에 완전히 가려졌다. 말 그대로 24시간 내내 학교에서조차 어머니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내 방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날에는 수업이 끝나고도 어머니의 부름으로 엄마 반에 가야 했고 엄마 반에 도착하면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으신 수십장의 학습지를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12시에 일찍 수업이 끝나는 날에도 어김없이 엄마 반으로 가서 공부하다가 4시 30분이 되어서야 어머니와 같이 퇴근하곤 했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이런 생활에서는 벗어나긴 했지만 4시 40분의 봉인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아직 자아가 생기지도 않았고 생각하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나뭇잎 같은 학생으로 지냈었다. 그 때문인지 다른 학생들에게 장난감 취급을 받았었다. 다행히도 왕따당하거나 심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왕따시키는 학생도, 왕따당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는데 왜 내가 대상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추측해 봤는데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를 순수하고 착하게 봐줬기 때문에 내게 접근하는 학생이 적지 않았고 그들 대부분은 나를 장난감처럼 대하긴 했지만, 그들이 내 옆에 있어 줬기 때문에 내가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장난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낯을 엄청나게 가리던 내게 일부로 말을 걸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즐긴다든지 지나가면서 내 머리를 툭툭 치면 바보같이 웃던 내 모습을 감상한다든지 도서관에 있던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가서 인형 다루듯 만지거나 건드린 뒤에 내 반응을 기대한다든지. 돌이켜 생각하면 불쾌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한다. 견물생심이라고 내가 돌이켜봐도 만만했던 나라는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화'라는 개념을 몰랐다. 정신연령이 유치원생 수준 같았던 그때의 나는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했으니 지키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고 화가 나는 것조차도 못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저 멀뚱멀뚱 멍청하게. 아, 그래서 지금의 내가 멍청함을 혐오하는 건가.
중학생인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보통 TV를 보고 싶어 했는데 문제는 부모님께서 내가 TV를 볼 수 없도록 플러그를 뽑은 뒤 전원 코드의 끝부분에 투명 테이프를 감고 그 테이프가 끝나는 부분에 싸인을 해 놓으셔서, 전원 코드를 연결하기 위해서 테이프를 떼면 자연스레 싸인이 망가지는 구조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걸리면 당연히 매를 맞는다. 하지만 간과하신 게 하나 있었다. 싸인이 지워지지 않게 조심해서 송곳으로 테이프 사이의 틈을 벌리고 접착력이 약해진 테이프를 잡고 힘껏 뽑으면 나중에 다시 그대로 끼워 넣어서 원상복구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런 식으로 TV를 즐겼다, 물론 봉인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만. 어머니께서는 내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관심을 주고 관리해 주신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감시, 간섭, 통제의 세 철창 속에서 살아간다고 느낄 뿐이었다. 나는 그 반작용 때문인지 고등학생이 되고 자아가 생긴 후부터 자유를 너무나도 갈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