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접시를 치우니 그 밑에서 바퀴벌레가 드러났다. 음식의 간이나 취향이 맞지 않는 양방의 '다름'이 아닌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발견되는 일방적인 '틀림' 말이다. 상위 수준의 레스토랑일수록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시골 골목의 식당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면 언성을 조금 높이다가 환불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최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면 폐업하거나 물갈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내 접시 밑에 고이 숨겨놓았던 바퀴벌레를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엄마에게서 나온 바퀴벌레, 아빠에게서 나온 바퀴벌레, 형에게서 나온 바퀴벌레. 그들도 기억하고 있을까, 잊었을까. 내가 다시 떠올린 이 사실 한 문장으로 그들의 고개를 축 떨어뜨리게 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소속된 레스토랑이기도 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가족을 떨어뜨리는 게 맞을까. 지금은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맛집의 레스토랑이 되었는데 구태여 과거를 들이미는 게 맞을까, 모르겠다. 그들이 내게 준 음식에 비하면 이 정도의 바퀴벌레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혹시 내가 숨겨놓은 바퀴벌레가 전부인 걸까. 이미 모르고 먹어버려서 내 배 속에 있는 걸까. 그때는 엄마도 아빠도 형도 젊었다. 젊고 참 어렸다. 혹시 내가 그들에게 건넨 음식에는 바퀴벌레가 없었을까. 애초에 내가 음식을 건넸던가. 그들도 접시 밑에 바퀴벌레를 숨겨 놓은 걸까. 모르겠다, 결국 나는 다시 접시로 바퀴벌레를 덮었다.
대학교, 당연히 내신은 엉망이었고 수능은 거의 모든 답을 4번으로 찍어서 8등급 내지는 7등급을 맞았는데, 신기했다. 9등급은 누가 받는 것인지. 미리 말하면 내 인생의 60% 이상의 지분은 아버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부족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 만큼을 대신 살아주시며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딱히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다 검색하시며 성적보다 면접의 비중이 높은 승무원학과를 찾아주셨고 13곳의 대학에 면접을 보게 하시려고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직접 태워다 주셨을 정도로 정성이셨다. 그중에서 상장 특별 전형에 면접 90%인 곳에 붙었다. 헌혈을 19번 해서 당시 교내 최다 횟수로 받은 상장 말고는 딱히 다른 상장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다행히도 열 개 정도의 상장이 있었다. 면접은 엄청 떨리고 제대로 못 했다고 생각했지만, 교수님께서 좋게 봐주셨었는지 감사드리게도 합격했다. 그렇게 남자 9명에 여자 230명 정도 되는 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거주지를 옮기면서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정신과 의원으로 기록을 옮긴 뒤에 정신 치료를 이어서 받게 되었다. 고등학생일 때와 다르게 대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는 매주 한 번씩 꾸준히 치료받고 있다. 일반적인 대인관계 형성이 불가능했던 내게는 정신의학과의 유대이자 의존이 유일했는데 심지어 졸업한 후, 서울특별시에 자취하게 되었을 때도 한동안은 세종특별자치시까지의 먼 길을 왕복하며 통원했고 상담 선생님의 추천으로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정신의학과로 옮기자는 권유받았을 때는 슬퍼서 상담 중에 펑펑 울었었다. 돌이켜보니 이때의 나는 엄마를 찾는 초등학생 같았고 상담 선생님을 엄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에도 나는 사람을 피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모든 술자리와 약속을 거절하고 기숙사에서만 생활했었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아서 사람을 만날 명분 없이 고립되기 좋은 상태였으며 나는 그 상태가 안정적이었고 만족스러웠었다. 지금 글을 쓰며 떠올려 보니 감사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지나치게 내성적인 나를 배려해 주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말 걸어 주고 다가와 준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못한 채 아무런 반응도 못 했었다.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자리를 피했었다. 미안하다. 당시 내 생활패턴은 고등학생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고 여전히 혼자서 겉도는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가장 앞자리에 혼자 앉았고 쉬는 시간에는 이어폰을 낀 채 엎드려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기숙사에 돌아갔고 기숙사에 돌아가면 노트북으로 노래를 들으며 궁금한 것들을 검색하고 생각하고 기록했다. 내가 인복이 좋은 편인지 당시 기숙사 룸메이트도 참 친절하고 정이 많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런 좋은 사람을 두고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의식적으로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저들에게 감사함을 느꼈기에 당연히 잘 지내고 싶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으로 몸과 입이 굳어버렸다. 그 괴리감은 날 상당히 힘들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늘 정신 연령이 너무나 어렸다. 객관적으로 어렸다. 당시 상담 선생님께 들었던 내용에 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는 말하면 나는 정신 연령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들었다. 모든 사람은 정신 연령의 스펙트럼이라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일반적인 경우, 신체 연령이 25살이면 정신 연령은 22살에서 28살 정도가 된다. 나는 그 편차가 좀 더 컸던 것이고 신체 연령이 23살일 때, 정신 연령이 15살에서 40살이라는 분석을 들었다. 40세의 정신은 외적으로 튈 일이 별로 없었지만, 15세의 정신은 감추기 어려웠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숨기 바빴다. 사람이 보이면 골목길로 돌아가고 인사받으면 못 본척하고 말 걸려 오면 못 들은 척하는 등 유치하고 한심하게 행동했다. 특히 성에 대한 정신 연령은 유난히 어렸었는데, 돌이켜 보면 대학생이 되어서도 일반적인 사람의 초등학생 저학년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24살이 될 때까지는 동성이나 이성에 대해서 성적인 것을 느끼는 감각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모두는 내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야동과 자위를 몰랐다. 그런 개념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25살이 되어서야 서서히 성에 대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처럼 나는 깨우치는 것에 있어서 대부분 늦었다. 여전히 내가 깨우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존재할 텐데 인지하지도 못 한 채 뒤처질까 봐 두렵다.
그리고 OT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아직은 서로 잘 모르지만 앞으로 잘 지내기 위해서 하나씩 알아가며 노력하는 시점. 다들 어른스럽게 말을 걸고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한심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버티기가 어려워 화장실에 숨어있었다. 또 하나, 나는 늘 사진 찍히는 게 싫었다. 내 흔적이 남는다는 개념이 거북했다. OT 첫날 저녁에 단체 사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모였을 때 나는 맨 뒤에 서 있다가 찍기 직전 "하나, 둘, 셋."에 일부러 주저앉아서, 졸업 앨범에 나와 있는 그때의 사진을 보면 내가 나온 사진은 없다. 이렇게나 한심하고 방어적이었다. 이후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달리 없었고 아파서 술자리에 못 간다며 거짓말한 뒤에 자는 척하다가 새벽에 몰래 나와서 주변을 산책하던 중에 편의점에 들러서 즉석 복권 30만 원어치 사다가 긁었는데 3만 원이 됐다. 다들 나처럼 서로 잘 모르는 상태일 텐데 자연스럽게 모여서 술잔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진심으로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샌드위치에 대변 네 스푼을 펴 바른 것처럼 내 과거를 되새김질 때면 매 한입 한입에 회피와 자기합리화가 불쾌하게 같이 씹힌다. 나는 내가 혐오스럽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안 할 수가 없다. 걷기는 한 건가. 의식이 원하는 것과 무의식이 원하는 게 다르다는 것은 날 아프게 한다. 머리로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지만 몸은 땅속으로 숨으려고 하는 이 괴리감이 날 찢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