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앞

미꾸라지 한 마리.

by ODD

대학생 1학년을 마칠 때쯤, 나는 군대에 빨리 가고 싶어서 바로 병역판정검사를 받으러 갔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싫어해서 빠르게 해치우고 싶었다. 언젠가는 무조건 빼앗길 22개월이니 미리 주고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수원에 위치한 병역판정검사장으로 갔다. 150명 정도가 모인 그곳에서 신체검사를 마친 뒤, 모니터가 정육면체에 가까운 옛날식 모니터의 컴퓨터가 사람 수만큼 준비된 곳으로 이동했고 내 자리에 앉아서 질문에 대한 객관식 대답을 체크하는 검사가 진행되었다. 컴퓨터로 진행된 검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나를 포함한 14명 정도를 호명하여 다른 곳으로 불려 나갔다. 그곳에서 종이로 된 또 다른 검사지를 받게 되었고 대답을 적고 제출했더니 한 번 더 나를 포함한 4명이 호명되어서 자리에 남게 되었다. 그렇게 7급, 재검이라는 결과를 듣게 됐었다.



몇 달 뒤에 재검사를 받으라고 해서 몇 달 뒤에 다시 한번 수원을 찾아 검사받았는데 또 7급이 나왔다. 두 번 모두 정신적 문제가 원인이었고 7급을 두 번 받은 나는 이 상태로는 입대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됐었다. 하지만 나는 입대를 원했었다. 국가를 위한 헌신 이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을 위한 효도와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의 의미로 입대를 원했었다. 당시의 나는 자기혐오가 심한 상태였고 보란 듯이 전역해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난 구제 불능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싶은 마음으로 기대에 부푼 상태였다.



이쯤에서 미리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고 그때의 나는 과장 하나 없이 지금의 나보다 100배 이상은 부족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여러분이 듣기에도 웃기겠지만 당시의 나는 군대가 어떤 곳인 줄 전혀 몰랐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흔히들 알고 있을 군대가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상식조차 일절 모른 채, 그저 '군대는 군인이 있는 곳이고 군인으로서 22개월을 보내야 한다.' 까지만 알고 있었다. 입대 지원조차 아버지께서 다 해주셨고 나는 군대에 관심이 없었기에 검색할 일도 없었으며 주변에 알려줄 사람도 없다 보니 군대에 대한 정보가 만무했었다.



엘리트인 형은 희소병을 앓았었기 때문에 면제받았었다. 내가 형보다 나은 게 있던 것이다! 나까지 면제받게 되면 아들만 둘인 부모님은 심히 섭섭해하실 수밖에 없으실 테고, 더불어서 아니라고는 하지만 평소에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형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나는 22개월이 사라지는 게 싫은 마음보다 형도 해내지 못 한 전역과 군필자인 아들로서 당당할 수 있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입대하기로 마음먹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 찾으신 방법은 학생 때의 좋은 평가가 있으면 그를 통해 입증해 낸 뒤 입대할 수 있다는 거였고 그래서 고등학교로 찾아가서 내 학생 평가를 봤는데, 좋은 내용이 많다기보다는 나쁜 내용이 하나도 없어서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곧바로 고등학생 때의 내 생활기록부를 복사 받은 뒤 제출하였고 다행히도 정상적으로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훈련병으로 들어가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께서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나를 자랑스러워하셨고, 형도 나를 다시 봐주는 듯 해서 너무나 기뻤던 좋은 기억이 있다. 뭐, 얼마 가지 못해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금요일에 입대했는데 1주 차 시작은 월요일이어서 입고 온 옷 한 벌로 금, 토, 일 3일을 보내야 했다. 너무나 생소했던 내무반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전 처음 써보는 침낭에 들어가 누웠는데 그 석면 천장의 줄무늬는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고 군 생활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그 전야는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곧 훈련병이 되는 게 확정이지만 아직은 민간인인 우리를 대하는 조교의 그 간신히 붙들고 있는 듯한 미묘한 배려는 날 압도시켰다. 아몬드 초콜릿처럼 곧 녹아버릴 배려 한 꺼풀만 사라지면 단단한 강압이 드러날 게 눈에 선했다.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퇴소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으라고 했다. 우리 내무반의 33명 중 7명이 나갔다. 그들은 다음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지금 당장 나간 것이다. 나는 꾹 참았다.



군 생활을 자세히 쓰기보다는 중요한 요점만 말하겠다. 결국 장하게도 훈련병 한 달을 버텨냈다. 하지만 나는 관심병사가 되었는데 소대장님과 면담할 때 그 두꺼운 필기 책 중에 내 페이지와 더불어 단 몇 장에만 노란 포스트잇이 빠져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훈련병 4주 차가 끝나갈 때쯤, 모든 훈련병이 넓은 강당에 모여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자대배치 결과를 확인하게 되었다. 다만, 나는 운전병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자대로 들어가기 전에 야전 수송 교육연대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한 달간 훈련받으며 운전병 면허증을 새로 따야 했고 간신히 붙었다. 그 후에 자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자대 배치를 받고 3일째 되던 날, 나는 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정말 노력하고 노력해서 꾹 참으며 어려움을 외면했지만 결국 한계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남들보다 훨씬 약하다는 것을. 다들 똑같이 와서 힘들게 싸워내고 버텨내는데 그 와중에 혼자 버텨내질 못하니 너무 부끄러웠다. 다만 변명하자면 내 신체 상태가 실제로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기도 했다. 재발한 부비동염 때문에 두통과 어지러움 등이 동반되어 신체가 악화됐고 동시에 혈압은 자동 혈압계로 측정하면 측정 오류가 나올 정도로 높았으며 더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 군의관님이 수동 혈압계로 측정해 주시면 220에서 260 사이가 나왔다. 참고로 정상 혈압은 120이라고 한다.



모두에게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마음과 동시에 나는 나대로 정신적,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고 점점 더 패닉 상태가 되어갔다. 자살 생각이 끊이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죽었을 때 엄마아빠가 얼마나 슬퍼할지, 내가 속한 부대는 얼마나 곤란해질지 이런저런 이유로 매일 울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30살에 입대하게 될지언정 정신적으로 훨씬 더 성숙한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입대했어야 했다. 당시의 내 모습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울고불고하며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문제아 같았다.



내 정신은 한계까지 힘을 다 써버린 근육처럼 맥없이 축 처졌고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부대에 큰 폐를 끼치는 사람이었고 자대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어갈 때쯤에 결국 그린 캠프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린 캠프는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같이 못 버티는 사람들이 오는 곳인데, 진짜로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문제가 있는 척을 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내가 있던 곳은 2:8의 비율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린 캠프에서 두 달을 보내고 현역부적합심의를 받기 위해서 어떤 연대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몇 주에 걸쳐서 여러 검사와 상담을 진행했고 최종적으로 심사를 받게 되며 심사 결과는 3가지, 공익으로도 병영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지 그마저도 안 되면 면제. 만약 문제가 있는 척 꾀병을 부리고 병역 거부의 의도성이 드러나면 육군 교도소로 갈 수도 있다. 실제로 최종 심사 받은 후, 대부분은 공익 판정을 받았고 나를 포함한 두 명이 면제를 받았으며 몇 명은 육군 교도소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약 6개월 만에 엉망진창이었던 내 군 생활은 끝났다.



이 자리를 빌려 부족한 저 때문에 고생하셨던 모든 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바쁘신 와중에도 세심하게 보살펴 주신 행정보급관님 진심으로 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7급 판정을 받은 시점에서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했어야 했는데 입대하고 싶다며 욕심과 억지를 부려서 결국 모두를 힘들게 했다. 당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악전고투했지만, 완전히 패배해 버린 나는 전의를 잃고 더욱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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