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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이기고 오는 봄의 얼굴

봄 마중

by 꿈꾸는 날들 Feb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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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식물을 대하는 데 있어 우리 엄마처럼 진심인 사람은 없다. 언제 추워하는지, 얼마큼 목이 마른 지, 만져 달라는 것인지,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인지, 햇살이 과한 건지, 바람이 필요한 건지 엄마는 언제든 단박에 알아챘다. 분갈이를 해야 하는 가장 적정한 시기도,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아 아프다는 작은 신호도 엄마는 한 번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마치 식물의 언어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엄마는 식물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받는 식물들은 언제나 빛이 났다. 몇 년을 시들어가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사망신고를 받은 식물도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기적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10년에 한 번 꽃이 필까 말까 한 이름 모를 식물도 엄마의 베란다에서는 해마다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만개했다.


하지만 식물계 미다스의 손.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엄마의 재능을 조금도 물려받지 못했다. 나에게는 마치 초능력과도 같은 그 능력이 없다. 누구나 쉽게 키운다는 다육이도 우리 집에서는 맥을 못 추리고 건널 수 없는 강을 수 차례 건넜다. 건조한가 싶어서 물을 조금 더 줬을 뿐인데 과습으로 뿌리가 상하고, 또 과습일까 봐 걱정돼서 물 주는 주기를 조금만 조절하면 잎이 노랗게 변하며 처참히 떠나갔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나에게 늘 어려운 과제였다. 원가지와 곁가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웃자란 것인지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것인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식물을 향한 마음은 있으나 무지와 잘못된 방법들은 언제나 엇박이 나는 외사랑으로 끝이 났다.

식물을 키우는 일에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포기하지 않고 꽃집을 기웃거리며 식물에 마음을 두는 건, 겨울을 이기고 오는 봄의 얼굴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작은 초록빛 하나가 집안을 얼마나 다정한 온기로 채워주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토록 작은 씨앗 하나가 온 우주의 무게를 뚫고 세상 밖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모습, 정말 기특하지 않은가. 그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얼었던 마음까지 따스해진다. 겨울의 땅을 깨우고 조용히 봄을 데리고 오는 초록빛을 바라보는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마치 내 인생에도 봄이 시작될 것만 같은 안도감을 갖게 한다. 아주 작고 여린 것 하나가 세상을 온 힘 다해 환하게 비추는 모습이 그렇게 감격스럽고 애틋할 수 없다. 아직은 식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자꾸만 시들고 병들게 하지만, 언젠가 엄마처럼 나도 베란다에 푸르른 정원을 갖는 것이 오래된 나의 로망이다.


씨앗이 땅을 뚫고, 싹을 틔우고, 작고 단단한 연둣빛에서 생기 가득한 초록으로 넘어가는 계절을 견디며 자신만의 꽃을 피우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마치 우리의 인생 같다. 우리도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는지 너무 쉽게 망각하게 되지만, 각자의 계절을 견디느라 햇살이 가득했던 인생의 순간들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우리도 모두 지구의 무게를 이겨내며 기어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존재들이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엄청난 생명력이 우리 안에 있다. 식물을 사랑하는 엄마의 손길을 보며, 사람을 사랑하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 인생을 살아가는 일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때론 기다려주고 때때로 먼저 손을 내밀어주며 그렇게 필요를 채워주고 돌보아 주는 일. 깊은 헤아림이 없다면 사랑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식물을 키우며 알게 된다. 가깝게 있고 싶다는 뜻인지, 조금은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인지, 메말라 있다는 신호인지, 너무 습하고 무겁다는 신호인지, 식물의 언어를 이해하듯 사람을, 아이를, 나의 마음을 바라본다. 적당한 때에 필요한 영양분을 채워주고, 때에 알맞게 잡초를 제거해 주고, 웃자라지 않게 가지치기를 해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다 보면 식물도, 아이도, 사람도, 심지어 나도 때에 알맞게 푸른 생기로 빛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식물을 사랑하는 일은 아주 작고 연약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길거리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은 꽃을 밟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나는 그 마음을 사랑한다. 작은 것을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마음 있어야 긴 겨울을 이기고 오는 봄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끝 어디쯤, 봄을 마중 나와 생각한다. 내 삶에도 겨울을 이기고 오는 봄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나도 누군가에게 봄의 얼굴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그렇게 우리가 서로에게 봄 같은 희망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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