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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팅 앱 사용자 Sep 17. 2024

이탈리아에서 섭식장애?

편지 9. 9월 21일

언니에게

이탈리아 와서 여행하고 친구도 사귀며 즐겁게 지내지만 스트레스받는 일도 있어. 요즘 내 걱정거리는 음식과 대인관계야. 난 알다시피 섭식장애에 걸렸었잖아. 여기 와서 식습관이 다시 좀 안 좋아졌어. 그걸 인지하고 영국에서도 조심하자는 의미로 식단일기를 쓴 거야. 여기 음식들은 맛있고 소화도 잘 되지만 대부분 밀가루 음식이라 쌀을 먹을 때만큼의 포만감을 느끼기 못하겠어.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더 많이 먹어. 많이 먹으니까 당연히 살이 찌고 살이 찌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먹을 것에 예민해지고. 그런데 또 배는 헛헛해서 이것저것 주워 먹고 악순환이야.


여기선 병원 가기도 힘들 텐데 많이 걱정돼. 일단 의사와 말이 안 통하겠지…… 식단일기 계속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려 하는데 힘들다. 한국에서도 병원비 많이 나왔었잖아. 여기서 병원 가면 난 바로 파산이야. 1, 2kg 찌는 거 정말 별거 아닌데 이렇게 몸무게에 민감한 것 보면 아직 난 아직 자신감이 부족한가 봐. 저번 편지에서 영국에서 2kg 쪘다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써놨지만 사실 몸무게 재보고 엄청 충격받았었어. 몸무게로부터 초연해지고 싶은데 그게 힘들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아닌가?


그리고 대인관계 문제는 뭐 누구랑 싸웠다는 건 아니고, 외국인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야.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져 오던 우울증과 무기력증, 반수, 공부, 섭식장애 등등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쉬러 온 거잖아. 그런데 보통 교환학생의 목적은 외국어를 배우거나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거고. 그래서 페이스북에 이벤트 공지가 뜨면 왠지 가야 할 거 같고 가서 외국인들과 광란의 파티도 벌여야 할 거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 사람들이 교환학생 가서 한국인이랑만 놀면 안 된다 외국인이랑도 친해져야한다는 말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부담이 돼.


우리나라 K대에서도 피렌체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보내더라고. 모두 같은 기숙사 살아서 우연히 만나게 됐어. 기숙사에 사는 한국인은 K대 3명 H대 나 포함 3명 총 6명이야. 사람들 모두 쾌활하고 친화력도 좋아 외국인 친구를 금세 많이 사귀었더라고. 난 낯을 많이 가려서 한국인이랑도 친해지는 게 어려운 사람인데 무척 부러웠지. 나도 모르게 자꾸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면서 조바심을 내게 돼. 영어권 친구들을 사귀어 회화실력을 늘려야 할 것만 같고 이탈리아까지 왔으니 왠지 이탈리아어라도 배워야 할 것 같고. 난 쉬러 왔는데, 내 목적은 1년 동안의 휴식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러냐고! 내가 너무 바보 같아.



-은경이가

P.S

예전부터 내가 왼쪽 손목 안쪽, 시계 차면 안 보이는 곳에 연갈색으로 인생의 좌우명을 문신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데 여기 와서 무슨 문신할지 정했어. ‘소신 것 살자’ 혹은 ‘내 갈 길 가자’로 하려고. 귀 얇고 줏대 없는 나를 각성시켜줄 문구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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