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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남자와 하룻밤

우당탕탕 나 홀로 산티아고, 에피소드10

by 아주nice

1-10. 문신남자와 하룻밤


33km, 7시간 이상을 걸었다. 늦게 출발했고 중간에 마을 구경도 오래 해서 순례길 시작 이후 가장 늦게 숙소에 도착한 날이었다. 미리 Booking.com으로 예약을 해두었기에 도착이 늦어도 내 침대는 확보돼 있을 거라 별 걱정은 없었다.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2층 도미토리 룸으로 들어섰을 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몸집의 세 배는 되어 보이고, 팔 다리는 문신으로 가득했으며, 머리는 부족 족장처럼 삭발한 가운데에만 뾰족뾰족 헤어스타일이 남아 있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오늘 밤, 이 사람과 단둘이 이 방에서 자야 해?” 방 안에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함께 있는 구조라 문이 닫히면 이 공간엔 나와 그 남자 단둘이 남는 셈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예약 내역을 다시 확인해봤다. 분명 4인용 도미토리를 예약했는데, 여기는 침대가 6개. 뭔가 잘못됐다 싶어 곧장 주인에게 찾아갔지만, 그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오직 스페인어뿐. 구글 번역기를 켜서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4인용 도미토리를 예약했고, 이 방은 6인용입니다. 지금은 저 남자와 저 단둘입니다. 불안합니다.” 주인은 “4인실은 이미 찼고, 그래서 6인용에 배정했으며, 지금 둘이 넓게 쓰면 오히려 더 편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그리고 “불편하면 더 돈을 내고 프라이빗 룸으로 옮기라”고 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예약한 방에 제대로 배정되지 않은 것도 억울한데, 왜 내가 돈을 더 내야 하는가.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손짓 발짓 다 해봤지만, 그들과 나는 끝끝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엔 불안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상상은 점점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혹시 오늘 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폭행이라도 당하면? 내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불신은 꼬리를 물고 짓눌렀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고, 이건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방을 나와 진정할 시간을 가졌다. 최대한 늦게 들어갈까, 밤새 공용 공간에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녁을 먹고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상상에 갇혀 있었을까?” 지금까지 별일 없이 잘 걸어왔고, 이 숙소는 샴푸도 린스도, 큰 타월도 제공하는 꽤 괜찮은 곳이었다. 결국 상대의 외모와 낯선 상황이 나를 위축시켰던 거였다. 늦게 방에 들어갔더니 그 남자는 이미 코를 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나도 너무 피곤했는지 그의 코 고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숙면을 취했다. 아침이 밝았을 때,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곤히 자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내가 낯선 상황에 과하게 긴장하고, 불신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뿐이다. 예약대로 되지 않는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 닥쳐도, 마음만 무너지지 않으면 괜찮다. 남녀 공용 도미토리룸에서 문신 남자와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원하지 않았던 경험 속에서도 생각이 한 뼘 더 자란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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