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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일준 Cho Iljoon Aug 24. 2023

눈물의 길, Trail of Tears

아메리카 원주민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

"우린 인디언이 아니며 아메리카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미국 국립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전시실 입구 설명문에는 이런 문구가 눈길을 끈다. 

15세기 유럽인들이 미주 대륙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곳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와 역사와 정체성을 이어온 수많은 원주민들이 있었다. 수백, 수천만 원주민들은 유럽에서 옮겨온 질병과 화약과 탐욕과 정복에 학살되고 유폐됐으며  동화를 강요받았다. 신의 이름으로, 우호의 이름으로. 그 야만과 화해의 기록이 미국에서 일부나마 보존되고 교육되는 것은 다행일까 비극일까.



꼭 10년 전 오늘(2013년 7월20일),1년간의 미국 연수가 끝나가던 때.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의 연방의회 바로 앞 건너편에 있는 미국 국립 아메리칸인디언박물관. 이 곳을 돌아본 소감을 졸저 <이주하는 인간 호모 미그란스>의 미국 원주민 강제이주 대목에서  잠깐 언급했다. 


pp. 137~140


미국의 대규모 원주민 강제이주와 재정착은 1830년 당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인디언 이주법 Indian Removal Act에 서명하면서 추진됐다. 애초 동부 해안 지역부터 터를 잡았던 백인 정착민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남서쪽으로 영토 팽창 압박이 커진 참이었다. 


이때부터 1850년까지 20년 동안 수 만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원주민들의 땅을 수용하는 대신 미시시피강 서쪽에 땅을 내어준다는 일종의 토지 교환 협상의 형식을 내세웠다. 그러나 누가 봐도 반강제적이고 불공정한 거래였다. 



백인 정부가 내세운 ‘원주민 보호’라는 명분은 정작 원주민 당사자들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반면 미국 정부는 원주민 강제이주와 재정착을 집행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백인들이 ‘문명화한 5대 부족’으로 여겼던 촉토족 Choctaw, 체로키족 Cherokee, 세미놀족 Seminole, 크리크족 Creek, 칙소족 Chickasaw  등 원주민 6만 여명은 졸지에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땅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주에 마련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내몰렸다.


백인 정부는 총칼로 무장한 군인과 민병대를 동원해 원주민의 이주를 강제집행했다. 많은 원주민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플로리다에 살던 세미놀족은 1835년부터 1842년까지 7년간이나 미국 육군 및 민병대와 전쟁을 벌였다. 1836년에는 백인 정부와 체로키족 대표들이 서로의 토지를 교환한다는 뉴 에코타 협약 Treaty of New Echota을 맺었고, 1838년부터는 이들에 대한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물론 체로키족에서도 저항하는 세력은 무참히 진압됐다. 원주민들이 떠나간 빈 땅에는 목화밭을 비롯해 광대한 농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제이주에 내몰린 원주민들은 수 개월 동안 황량한 들판과 험한 계곡을 지나고 거센 물살의 미시시피 강을 넘어야 했다. 미군 기마병들이 감시 및 안내자로 나서 호송했지만, 대다수 원주민들은 걸어가야 했다. 낮에는 하염없이 걸었고, 밤에는 별을 보며 고단한 몸을 뉘었다. 그 과정에서 많게는 1만5000여명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1300~2000km에 이르는 그 여정엔 ‘눈물의 길’ Trail of Tears 이라는 서러운 이름이 붙었다. 체로키족은 그렇게 쫓겨가는 길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를 부르며 핍박을 견디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 노래가 원주민 토속곡이 아니라 백인이 만든 기독교 성가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놀라운 은총’이라는 제목과 달리 그들이 부르는 선율은 애처롭기만 했다. 알렉시 드 토크빌 Alexis de Tocqueville은 1831년 멤피스와 테네시에서 지켜본 촉토족 이주의 음울한 풍경을 뒷날 <미국의 민주주의>에 이렇게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폐허와 파괴의 분위기,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이별을 드러내는 뭔가가 있었다. 마음이 짓눌리는 슬픔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디언들은 조용했지만 침울했고 말이 없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사람에게 ‘촉토족은 왜 자신들의 나라를 떠납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자유롭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다른 이유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가장 축복받고 가장 오래된 아메리카 사람들의 추방을 지켜보았다.” 


Alexis de Tocqueville, <Democracy in America>


  (중략)


현재 미국에는 326곳의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연면적은 대략 5620만 에이커로, 미국 전체영토의 2.3%를 차지한다. 지금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합법적으로 카지노를 세울 수 있고 면세상품 판매권도 주어졌다. 그러나 다양한 볼거리와 여가시설, 호텔과 쇼핑단지 등 제대로 된 충분한 관광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원주민 보호구역까지 가서 카지노를 즐길 관광객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소수 원주민 부족은 ‘보호’라는 구실 아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터전을 일정 구역 안으로 제약받는 역설적 차별에 놓인 형국이다. 


 (중략)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연방의회 건물의 바로 건너편에는 국립 아메리칸인디언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이 있다. 주요 원주민 부족들의 역사와 문화를 원주민의 관점에서 보존,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에 가면 ‘역사 만들기’ Making History 라는 설명문이 눈길을 끈다. 


“원주민들에게 역사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전쟁터이자 정복의 무기가 됐다.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인디언들을 완전히 무시했다. 다른 역사 기록들은 우리를 미개하고 잔인하게 묘사했다. 


드물긴 하지만 가끔 어떤 역사적 설명들은 사려 깊고 복합적인데, 그것들은 인디언들도 전적으로 사람이며 다른 어떤 인간들처럼 지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쓴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그런 역사 기록의 저자가 결코 아니었다.”


이 박물관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주요한 부족별 전시공간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그 중 치리카후아 아파치족 Chiricahua Apache 의 전시실에는 영문으로 쓰인 부족명 아래 “We Are a Peaceful People(우리는 평화로운 사람들입니다)”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붙어있다. 


아파치족은 미국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매우 용맹한, 또는 호전적인 부족으로 각인돼 있다. 미국 육군의 공격용 헬기인 AH-64 시리즈 헬리콥터의 명칭도 이 부족의 이름에서 따왔다. 정작 아파치족 자신들은 평화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 해명, 호소는 박물관의 담벼락을 멀리 넘어서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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