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히 가라앉은 밤 산책을 마치고 파티로 흥분되었던 준하의 집으로 돌아와 자고 있던 미주의 아이와 미주와 성진을 배웅했다. 성진은 조용한 미소로 준하와 희서를 축복했다. 아이가 깰까 조용히 자동차 문을 신경 쓰며 성진이 차에 타자 미주가 창문을 열고 나지막이 말했다.
"희서, 행복해야 해. 곧 다시 만나."
희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 안쪽으로 손을 넣어 미주의 어깨를 다독였다. 차가 조용히 준하와 희서에게서 멀어져 갔다. 준하가 가만히 서있는 희서를 두 팔로 감싸고 희서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준하 집 거실의 천장까지 길게 이어진 유리 진열장에는 켄타우로스가 그려진 꼬냑이 있었다. 희서는 혼자 웃었다. 희서가 언젠가 제주 여행을 했을 때 한 술집에서 같이 동석했던 사람이 마시던 꼬냑의 향에 취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사둔 것과 똑같은 꼬냑이었다.
켄타우로스는 구름이 낳은 생명이다. 사람과는 조금 다른 종족이지만 강인하고 지적이며 때로는 폭발하듯 뜨거운 생명체다. 꼬냑을 마실 때마다 변해가는 자신의 온도를 느끼며 강하게 변하는 것 같은 술, 레미 마틴 엑쏘는 희서가 가장 좋아하는 꼬냑이었다. 준하의 집에서 똑같은 켄타우로스 레미 마틴 엑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더 준하를 가지고 싶었다. 우린 꼬냑의 눈물을 나누어 마셨다.
해가 거의 중천에 떠서야 잠이 깬 희서는 해외 출장 때문에 회사에 나갔다 오겠다는 준하의 짧은 메모를 읽었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강 정리하고 침대 시트를 감은 몸으로 일어나 앉았다. 주방 쪽에서 오는 진한 커피 향이 뜨겁게 마음을 채웠다. 커피를 내려두고 나간 준하가 고마웠다.
갑자기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복잡했던 시간들이 스스로 정리되고 꽤 명확하게 지금까지 담을 올려 쌓아 나누어진 공간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어떤 의도적인 결속도 필요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존재로 상대에게 인정받는 기쁨은 어떤 표현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리고 자유롭다.
동후는 여전히 바쁘지만 항상 거의 그래왔듯이 주말에는 희서를 위해 저녁을 만들었다. 정말 한결같이 따뜻한 동후였지만 준하가 한국에 돌아왔을 즈음의 그런 냉정함과 이성적인 눈빛은 언제나 희서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서늘한 이성으로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동후, 어쩌면 그게 그의 큰 장점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그런 냉정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후는 자기 자신을 일부러 얼음처럼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희서는 동후를 피했다. 각자 서재에 들어가 필요한 메시지만 톡으로 전하곤 했다. 뭔가 희서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결국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하가 돌아온 후 희서는 피난처처럼, 또 안식처처럼 준하에게 가곤 했다. 준하가 없는 준하의 공간마저도 희서에게는 위안이며 기쁨이었다. 몸부림치며 기쁘게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희서는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기를 쓰며 생각하고 기뻐하며 계속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결핍들이 희서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시간은 허무하게 지나가고 기쁨은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한다. 시간은 흩어지고 옅어지는 기쁨을 채 다 잡아두지 못한 채 이내 나그네가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들을 오래 잡아두고 싶었다. 기쁜 마음을 제대로 충분히 담지 못하는 시간이라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희서는 계속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지금은 괜찮아. 이게 행복한 거잖아. 준하가 옆에 있잖아. 괜찮아. 이 이상한 두려움이 뭔지 희서는 알 수 없었다.
차가운 상상을 너무 했는지 두통이 몰려왔다. 눈이 뜨거워져서 손으로 눈을 감싸고 눈 안쪽을 어둡게 빙빙 돌며 손바닥에 닿는 데칼코마니 무늬들을 천천히 따라다니며 더 행복해질 거야 꾹꾹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