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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by 희수공원

"아, 주현주 선생님이요. 이제 여기 안 계시고요, 작년에 대학병원 여성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셨어요."

여성연구소라는 말에 그 예전 바에서 만났던 주현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명에 대한 진한 애정을 보였던 그녀, 생명의 소리 없는 사라짐에 슬퍼하며 꼬냑을 마셨던 그녀의 슬픈 표정이 여전히 희서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몇 년 전 제주의 기억으로 사람을 찾아 만난다는 게 새삼 희서의 끈적한 습관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 되도록 혼자 모든 걸 해결하고 정의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람에 닿았던 그 마음에 미련을 두고 속눈물을 흘리곤 했던 희서였다. 어쨌든 계속 주현주와 연결이 되고 있다는 느낌은 마음을 편하게 했다.

대학병원의 여성연구소를 검색해 보니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 부부들을 돕는 난임연구를 하는 곳도 있었고 여성들이 앓는 각종 질병들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를 하는 규모가 꽤 큰 조직이었다.

피임 없이 정상적인 관계인 경우 90% 이상이 1년 이내에 아기를 갖는다는 통계에 놀라며 희서는 준하와 얼마나 같이 지냈는지 생각해 봤다. 아직 같이 지낸 지 1년이 채 안되었지만 준하는 아기를 원하고 희서 또한 준하와 아기와 어서 가족을 이루고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예약을 하고 3주 정도를 기다려 드디어 현주를 만나는 날이 왔고 준하와 함께 병원에 갔다. 박사를 마치고 연구소에 교수로 온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며 희서를 본 현주는 환하게 웃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현주의 미소와 얼굴이 그 옛날 만났던 그녀의 얼굴과 대조되었다. 희서는 행복해 보이는 현주를 따라 같이 흥분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현주는 준하와 희서가 어떻게 지내는지 생활 루틴을 상세히 물었다. 준하나 희서나 극히 바쁘게 뛰어다니며 지내고 있었다. 주말에만 잠시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같이 살면서도 주말 부부 같은 그런 스케줄을 서로에게 기대가며 지내고 있었다. 현주는 일을 조금 줄이고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며 스트레스와 부족한 잠 때문에 아기가 생기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준하와 희서의 나이가 30대 중반이 되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최적기가 지났다며 현주는 건조하게 상황을 전했다. 그러니 더더욱 생활 패턴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꼼꼼하게 리스트로 만들어진 목록들을 읽으며, 생명이 오는 길이 정말 쉽지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병원에 가면 거의 그렇듯 각종 검사를 하고 결과를 보러 다니는 것에 지치곤 했다. 혹시 모르니 이런저런 검사를 추천하는 현주의 말을 준하와 희서는 아이처럼 따르고 있었다.

아기를 갖고 싶은 간절함만큼 생활의 여유에 신경을 쓰며 편안한 루틴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희서는 애정이 많았던 초등학생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학 교수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기간제 계약직으로 있던 특강 강사를 그만두고 아기를 갖기 위해 더 건강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준하가 결혼식을 올리고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준하는 결혼을 하면 공식적으로 두 주 정도를 쉴 수 있다며 마치 사업제안을 하듯 문득 희서에게 말했다.

"그럼 결혼식을 하자는 거야? 난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넌 어때? 결혼식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아도 휴가를 쓸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면 좋겠어. 나는 아주 간소하게 했으면 해."

"오케이,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게. 나도 호텔이나 예식장 같은 곳에서 줄 서서 결혼식 올리는 건 생각만 해도 답답하거든. 어떤 방식으로 할지 같이 생각해 보자. 미주처럼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맞는 방식이 있을 거야."

미주의 결혼 얘기를 동후에게 전해 들었던 모양이었다. 친구들을 초대한 칵테일파티에서 예복을 차려입고 나타나 결혼이라며 소리쳤던 미주가 떠오르면서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희서의 이쁜 친구, 희서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집으로 돌아와 결혼식과 관련해 신나는 아이디어들을 떠올려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희서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준하! 나 희선데, 그 결혼식 말이야, 나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어!"

희서는 준하의 동의에 더 신이 났다.

"오, 멋진 생각이야! 재미있겠는데? 우리 부모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이미 이전에 판에 박힌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고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어서 크게 반대하실 것 같지는 않아. 근데 너무 창의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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