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일과, 예온이를 기다리는 일은 전혀 다른 경험임을 깨닫고 있다. 학생들이 문제를 풀거나 발표할 용기를 내기를 기다리거나, 친구와 화해할 시간을 주는 일은 대체로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교사로서 나는 그 시간까지 충분히 기다리면 대부분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 세 시, 여러 번 기저귀를 갈아주고 나서 문득, 육아의 기다림은 전혀 다른 차원임을 느꼈다. 딸의 통잠이 안정되기를, 수유 간격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울음의 이유를 조금 더 알아차리게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이에게 달려 있었다.
교실에서의 기다림은 어느 정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육아의 기다림은 완전히 아이 중심이었다. 교사로서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아이 앞에서는 나는 여전히 초보 아빠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무력감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감과 연결되어 있었다. 교실에서는 늘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딸 앞에서는 몰라도 괜찮고 서툴러도 되는 상황이 자연스러웠다. 완벽하게 해내기보다,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더 의미 있었다.
그동안 나는 우리 반 학생들에게 “사랑한다”라고 자주 말했지만, 딸을 안아본 순간 느낀 감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교실에서 말했던 사랑에는 격려와 보호, 성장을 돕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딸을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올라오는 감정은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것이었다.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이유 없이 존재 자체가 귀하고 사랑스러웠다. 교실에서는 “왜 숙제를 안 했니?” “왜 친구와 다퉜니?”라고 물었지만, 딸이 새벽 내내 울어도 따지지 않고 그저 안아주고 달래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경험은 나의 교실 시선에도 변화를 주었다. 아이들도 누군가에게는 이유 없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더욱 명확히 느끼게 되었다.
육아는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다. 기저귀를 갈다가 실수하기도 하고, 수유 시간을 잘못 계산해 일찍 깨우기도 하며, 울음을 달래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다 지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딸은 여전히 나를 믿고 매달린다. 그때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중요한 것은 진심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 나는 교실에서도 실수하면 솔직히 사과하고, 모르는 것은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교사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아이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완벽한 척하는 어른보다, 사람 냄새 나는 어른을 아이들은 더 좋아한다는 것을 육아를 통해 배웠다.
겨우 두 달 된 초보 아빠지만, 딸은 매일 새로운 교훈을 준다. 육아가 힘든 일임을 매일 느끼지만, 이 경험 덕분에 교사로서 나 또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