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삼십 명이 조금 안 되는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으로, 밤에는 생후 160일 된 딸아이의 초보 아빠로 살아가는 요즘이다. 교실의 소란함이 가라앉으면 어느새 형태를 바꾸고 자리를 옮긴 새로운 소란스러움이 찾아오고, 그마저도 사라질 때쯤 하루가 쉬이 저문다. 오롯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에 이리저리 생각이 뻗어나가곤 하는데, 그중 하나의 깨달음을 정리하려 한다.
생후 160일, 뒤집기를 시작하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왕성해진 딸아이에게 최근 '분리 수면'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포근한 품에서 잠들던 아이를 홀로 아기 침대에 뉘어놓고 방문을 닫고 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결단이 필요했다. 패드 너머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만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아이에게 쪽쪽이를 물려 다시 쉽게 잠이 들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본능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나 아내가 들어가서 토닥이면 1분 안에 그칠 울음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아 서적과 전문가들은 아이가 스스로 진정하고 다시 잠들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반응을 늦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참기로 한다. 악을 쓰던 울음이 결국 조금씩 잦아들더니, 아이가 스스로 손가락을 빨거나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내, 깊은 숨소리와 함께 스스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내가 해결해주지 않아도, 아이는 이미 스스로 평온을 찾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 기회를 너무 쉽게 뺏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음 날, 학교 교실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두 아이의 언성이 높아졌다. 사소한 놀이 규칙 때문에 벌어진 작은 말다툼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즉시 달려가 "누가 먼저 그랬어?", "서로 사과하고 악수해"라며 판사처럼 시시비비를 가리고 화해를 종용했을 것이다. 그것이 교사의 효율적인 지도 방식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어젯밤의 깨달음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차분히 말하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안내하고는 한 발자국 물러나 기다렸다. 아이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늘 정답을 알려주던 어른이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음 쉬는 시간에 "네가 아까 밀어서 기분이 나빴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미안해"라며 투박하고 서툴지만, 자기들만의 언어로 매듭을 풀고 있었다. 내가 개입해서 억지로 시킨 사과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는 해결이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혹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빨리 정답을 쥐여주려 한다. 아이가 겪어야 할 불편함과 갈등을 미리 제거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그 불편함의 시간,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막막한 그 시간 속에 숨어 있었다. 울음을 참고 스스로 잠드는 법을 터득한 160일 된 딸아이와 서운함을 견디고 친구와 화해하는 법을 찾아낸 우리 반 학생들. 이들은 내가 가르쳐준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한 교훈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열정보다, 아이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불안해하지 않고 지켜봐 줄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기다림은 방관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에 있는 힘을 믿어주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임을, 나는 오늘도 아빠와 선생님 사이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