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마지막_혼자 잘해볼게요
내년 생일이 당연히 오지는 않는다 #9
시간은 흘러 나는 이직을 했고, 남자친구와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신혼집은 상담 센터와는 거리가 있던 곳이어서 반강제로 상담을 종료해야 했다. 그리고 사실 슬슬 이제 상담을 쉬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너무 자연스럽게 선생님한테 말하고 풀어야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스스로 스트레스를 소화하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나, 배운 것을 실전에 써먹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와 같이 선생님이 주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선생님, 저 결혼하기로 했어요."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활짝 웃었다.
"와, 정말 축하해요!"
"신혼집이 여기에서 꽤 먼 곳이어서 상담을 계속 받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구나, 많이 아쉽네요. 그럼 우리 오늘은 상담의 마지막이니, 최종 목표였던 것을 한번 해볼까요?"
선생님은 내가 마지막이라고 말할 것을 알았던 것처럼 준비한 것을 꺼냈다. 언젠가 봤던 인형이 든 상자였다. 노란 인형을 나라고 생각하고 많은 말을 하라고 했었는데.
"이 인형들 기억나요?"
"네, 이 노란색이 저였잖아요."
"맞아요. 잘 기억하고 있었네요."
선생님은 또다시 상자를 뒤집어 모든 인형을 꺼내고, 노란 인형만을 넣었다.
"자, 이 노란 인형 근처에는 많은 사람이 있어요."
나는 색색의 인형을 쳐다봤다.
"A씨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열 명 떠올리면서 상자 안에 인형을 넣어주겠어요?
"검은 인형은 아빠예요. 저희 아빠 되게 까맣거든요. 그리고 빨간 인형은 엄마, 초록이랑 연두 인형은 제 동생들이에요. 그리고 주황 인형은 제 남자친구예요. 분홍색 인형은 제 친한 친구 S, 보라색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 음 언니와 언니가 만나게 해 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래요. 아무튼 갈색 인형은 우리 할머니. 마지막으로 이 회색은 X에요."
"좋아요. 이 상자 안은 A씨의 과거이고, 상자 밖은 A씨의 현재예요. A씨가 현재로 가져올 사람은 누구예요?"
나는 먼저 주황 인형을 상자 앞에 앉혔다.
"남자친구요. 이제 우리는 함께 현재를 살아가겠죠? 제 현재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요?"
보라색과 분홍색 인형을 집었다.
"S랑 언니. 이 사람들을 만난 건 제 인생에 행운이나 다름없어요. 제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선생님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고 나는 빨간색, 초록색, 연두색 인형을 한 번에 집었다.
"이제 네 명이 된 우리 가족도 현재로 데려올 거예요. 이제 여기에 이 주황 인형도 같이 두어야겠죠? 새로운 가족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갈 거예요."
"A씨는 정말 훌륭한 학생이에요. 배운 걸 이렇게 다 기억하고 응용할 수 있다니."
나는 수줍게 웃었다.
"선생님, 이제 다 옮겼어요."
"그래요? 그럼 이제 상자에 남은 인형들에게 한 마디씩 할까요. 이제 이 상자를 덮으면 인형들은 A씨의 현재와는 분리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곧바로 회색 인형을 집어 올렸다.
"X야, 너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너나 나나 너무 어렸던 것 같애. 뭐가 됐든 그때 너도 고생 많았다. 그치만 이제 생각이 정리되었어. 너는 쓰레기야."
선생님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솔직한 A씨의 마음을 듣네요. 맞아, 잘하고 있어요."
갈색 인형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할머니, 거기서는 안 아팠으면 좋겠어. 할머니 마지막에 너무 아팠잖아. 그래서 나 차라리 할머니가 빨리 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내가 이 상자에 두더라도 할머니 생각은 자주 할 거야. 많이 사랑해."
그리고 검은색 인형을 집었다. 동그란 게 아빠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아빠에겐 더 길게 말하고 싶었는데, 장례식 때처럼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빠, 나 있지. 아직 완벽하진 않은데 그래도 노력해 볼게. 아빠를 온전히 과거에 두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아빠를 보내줄 거야. 선생님하고 연습도 많이 해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빠 내가 많이 사랑해."
상자 속 인형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선생님 이제 다 됐어요. 뚜껑 닫으면 되나요?"
"아직 하나가 남았어요."
나는 상자 안을 쳐다봤다.
"다 꺼냈는데요?"
선생님은 노란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인형이 아직 과거에 있네요. A씨가 우리의 상담에서 이것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상자에 있으면 안 되고,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해요. 현재를 살아야 하고, 현재에 집중하고. 가끔 상자를 열어서 과거를 추억할 수는 있지만, A씨가 상자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A씨가 앞으로 이렇게만 해준다면 우리의 상담은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거예요. 이제 노란 인형도 상자 밖으로 옮겨줄까요?"
나는 누워있는 노란색 인형을 밖으로 옮겼다. 어쩐지 눈물이 펑펑 났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과거에 갇혀 있었던 것이었다.
"선생님 말대로 가장 중요한 것을 까먹었네요. 이제 상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선생님은 빙긋 웃더니 나에게 뚜껑을 건네줬다.
"A씨가 직접 상자를 닫아볼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어쩐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상자 밖 나란히 앉은 인형들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저의 서툰 감정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말해주니 너무 고마워요. 저는 A씨가 앞으로 잘 살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직면하고 저를 찾아온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요. 인생을 살면서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용기 있게 헤쳐나가는 A씨가 되길 바라요. 그동안 저도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