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로 끊어지는 관계 감당하기

내년 생일이 당연히 오지는 않는다 #7

by 진동글

"첫 연애"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때 나는 15살, X도 15살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사귄 지 22일-투투라고 불렀다-이 되는 기념일을 챙기고 얼마 안 되어 헤어질 때도 X와 나는 늘 함께였다. 서툴게 시작했던 우리는 21살에 그 마지막을 고했고, 나의 첫 연애는 무려 6년짜리였다.



헤어짐의 사유는 아마 아직도 X와 내가 서로 다르게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별 사유는 X의 바람이었고, X의 이별 사유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X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걸 나의 지인이 보았고, 사진까지 찍어 전달해 주었다. 나는 바로 X에게 따졌고 X는 마음은 안 줬으니 바람은 아니라며 차분히 말했다.



"너랑 헤어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여자친구는 계속 너였을 거야. 그런데 지금 깨달았어. 나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무표정으로 손을 올려 X의 뺨을 때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강냉이를 던졌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때의 나는 화가 나기보다 당황했다.



사실 X에게 따지러 오면서도 나는 이별을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한테 팔이 있고 다리가 있는 것처럼 내 옆에는 X가 있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팔다리를 갑자기 자르는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칼을 쥐고 있는 것이 X라는 것도.







서툰 첫 연애에서 나는 X와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모든 것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X가 곧 나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X가 햄버거를 좋아하니 햄버거라고 답했다. 나는 탕수육을 좋아하지 않지만, X가 좋아하니 너무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X는 또 다른 나였다. 또 다른 내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속상했고, 온 중심이 X였으니 이 연애가 건강할 리 없었다.


X의 똥논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 그 사건이 아니었어도 우린 헤어졌을 것이다. 만약 헤어지지 않았다면 온 중심이 X 뿐이었던 나도, 내 우주가 되어버린 X도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지만, 첫 연애 이후 그리고 아빠의 죽음을 겪고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나를 온전히 활짝 열지는 못했다.


나를 온전히 드러내 보였던 사람이 나를 부정해서였을까. 누군가 나의 본모습을 본다면 분명 나를 싫어할 것이, 나를 떠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갉아먹었다.








선생님과의 상담에 있어서 주로 가족 이야기를 해서인지, 나의 연애는 굉장히 늦게 입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 이야기를 안 했네.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에요?"



"제 남자친구는 키가 크고 잘생겼고.."



"푸핫, 그리고요?"



"음, 포근한 사람이에요. 남자친구는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아서 제가 감정이 요동칠 때도 저를 꼭 잡아줘요. 사랑의 크기가 비슷한 연애가 주는 안정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사랑의 크기가 비슷하다니, 그런 사람 만나기 힘든데."




나는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저 사람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그래서 그런가. 처음에는 제가 막 들이댔다니까요. 설렘과 안정감을 둘 다 느끼게 해주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좀 무섭기도 해요."



"무섭다고요? 어떤 게?"



"그냥 뭐. 너무 좋아서 자꾸만 마음이 열려요."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 연애가 나왔다.



"뭐 흔한 이야기예요. 첫 남자친구는 바람피워서 헤어졌어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다음은.."



어지간하면 내 말을 끊지 않는 선생님이 갑자기 내 말을 막았다.



"방금 그 사람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줄 수 있어요?"



나는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만났고, 왜 헤어졌는지, X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줄줄 과거 일을 읊었다.


선생님은 빤히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들었고, 손으로는 끄적끄적 무언가를 썼다.




"A씨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A씨한테는 X와의 이별이 아마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크게 다가왔을 거예요."


"선생님,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왜냐면 A씨에게는 둘 다 사고 같은 거거든요. 본인은 계속 아니라고 하지만, A씨는 단단한 사람이라 관계에 있어서도 굉장히 주도적인 편이에요. 맺고 끊는 것을 본인이 하길 원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관계의 끊김은 A씨가 크게 힘들어하진 않죠. 외할머니의 죽음이 그래요."



"아, 그러네요."



"외할머니의 죽음은 A씨가 마음의 준비를 했던거라 그래요. 오랫동안 아프셨다고 하니 할머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했을 거고.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건강히 그 관계의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거예요."




어쩐지 나는 선생님 앞에서 숨고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깍지를 꼈다, 풀었다 했다.



"X 이야기를 하는 게 불편하죠?"



"네, 굳이요. 그냥 흔한 이별 이야기잖아요. 풋풋하지만 서툴었던 사랑 이야기잖아요. 바람 폈다고는 해도 열 명 중 한 명은 겪었을걸요? 몇 년 전 일에 아직도 연연하다니 너무 싫어요."



"힘듦에 경중이 어딨어요. 그리고 A씨는 다정한 사람이라 더 크게 다가올 거예요. A씨의 다정한 마음이 일방적으로 거절당한 것이니까요."



"미련이 남았다는 거예요? 그건 진짜 아닌데요?"



"이건 미련이랑은 달라요. A씨가 사고를 당했고, 아직 그 후유증이 남은 거라고 봐야 할까요. A씨가 초록색으로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길을 건넜어요. 그런데 그때 급하게 회전하던 차에 치여 접촉사고가 났어요. 그럼 이때 과실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운전자요. 저는 초록불일 때 건넌 것이니까요."



"맞아요, 그런데 이때 A씨의 과실을 굳이 따지자면 주변을 보지 않았다는 거겠죠? 하지만 그 퍼센트는 많이 낮죠. 저는 A씨가 앞으로 관계의 단절을 겪을 때 일종의 사고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단, 객관적으로 A씨의 잘못이 없는 경우여야 해요."


"너무 어려워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주아주 간단해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으면 되어요. 만약 A씨의 잘못으로 일어난 관계의 단절이라면, 반성하고 성찰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A씨의 잘못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면 이건 그냥 사고예요. A씨가 어찌할 수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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