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목표. 솔직하게 감정 표현하기
내년 생일이 당연히 오지는 않는다 #5
상담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솔직하게 감정 표현하기, 양보하지 않기, 타의로 끊어지는 관계를 내 탓으로 돌리지 않기.
이 세 가지 목표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를 선생님과 함께 꺼내보며 우리가 함께 정한 목표였다.
어느덧 상담센터로 가는 길이 익숙해졌다. 회사에서 나와 편의점에 들러 생수를 한 병 산다. 오늘은 선생님한테 라떼 말고 다른 거 내려달라고 해야지.
데스크에 앉아계신 선생님께 꾸벅 인사하고 대기 의자에 앉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근처에서 어슬렁대는 고양이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털이 하나도 없는 신기한 고양이. 무슨 종이라서 그랬댔는데 뭐였더라.
갑자기 원장실 안에서 으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놀라 어딘가로 숨었고 나도 깜짝 놀라 움찔했다.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으악하는 소리는 이내 통곡하는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무언가 우당탕탕 던져지는 소리도 났다. 무슨 일이시길래 그러실까. 얼굴도 모르는 분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내 내 차례가 되었고 원장실에선 원장님과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 함께 나왔다. 원장님은 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그분을 배웅했다.
"일찍 왔네요~ 커피도 내려야 하고 잠깐 준비도 해야 해서. 5분만 기다려줄래요?"
"네네 그럼요."
"오늘도 라떼?"
"오늘은 그거 하늘색? 플랫화이트 먹어볼래요."
"그래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정확히 5분 뒤 다시 원장실이 열렸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깔끔한 모습과 웃는 얼굴의 원장님을 보니 어쩐지 측은지심이 들었다.
"선생님은 쉬지도 않고 바로 또 저 상담하시는 거예요?"
"오늘은 A씨가 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나 보네요."
"선생님은 안 힘들어요? 사람들의 힘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잖아요."
"A씨가 좋은 책을 만들려고 수십 번 원고를 보는 것처럼 저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많은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그러니 이번주에는 A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까요?"
"선생님이 맨날 말씀하시던 일이 일어났어요."
선생님은 늘 나에게 적당히 화나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이제 선생님하고 어느 정도 편해져서 이렇게 악담하는 상담이 어딨냐 환불해 달라 장난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바라던 일이 생겼다.
회사에서는 1년 치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정말 많은 사람이 엮여 있었다. 그런 만큼 서로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중 K님은 나에게 무척 친절했다. 웃는 게 예쁘다, 너무 살갑다, 귀엽다 등등 각종 칭찬을 매번 늘어놨었다. 그때의 나는 20대였고, 그분은 40대였기에 그냥 딸 같나 보다 싶어 네네하고 흘려 넘겼다. 그런데 다 같이 간 술자리에서 살짝살짝 손을 자꾸 건드리길래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날은 남자친구 얘기를 잔뜩 하고, 프로필 사진도 남자친구와 찍은 것으로 바꿔 놓았었다.
밤 열 시, 전화가 왔길래 원고 관련이겠거니 바로 받았다. 술이 잔뜩 취해서는 나 들으라고 그런 얘기를 했냐부터 여기 너네 집 근처인데 나올 수 있냐,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아냐 등등 줄줄이 술주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1초에 한 번씩 전화를 끊고 싶었다.
정말 고민고민하다 뭐라 말하는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계속 핸드폰이 울렸지만 무음으로 바꿔놓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4통이 와있었고,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에게 호출당했다. K님이 프로젝트를 그만두겠다고 했다며 여러 원인 중 내가 있다고 했다. 내가 일을 못해서 답답했다, 버르장머리가 없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덧붙였다고 했다. 팀장님은 그럴 리가 없는데 싶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그분이 간과한 건 우리 팀장님과 나의 관계였다. 팀장님에게 직접 일을 배웠기 때문에 팀장님은 내 사수나 다름없었다. 나를 꽤나 가까이서 지켜보셨고, 무척이나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그런 팀장님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릴했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변태 아저씨 같으니. 그런데 마음이랑 다르게 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원장 선생님의 푸우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 날 때 3단계 생각하라고 했는데.
(1단계. 뭐가 됐든 눈물이 나면 일단 잠깐 뇌를 멈추고 생각을 정리해라.)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일어서는 순간 눈물이 흘러서 자존심 상했지만, 걸으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2단계. 사실 여부만 생각하기
밤에 전화한 거 선 넘었다, 손 잡으려고 한 거 선 넘었다, 갑자기 일적인 걸로 걸고넘어지는 거 선 넘었다)
화장실 말고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타며 생각했다. 선 넘은 것 투성이니 이건 화낼만하다.
(3단계. 내 감정 솔직하게 인정하기
껄떡대다 실패한 걸 일적인 것으로 가져오다니 열받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예뻐해 주는 팀장님한테? 어처구니가 없네. 일을 못해? 아 그건 그럴 수도 있지. 열심히 하는 거랑 잘하는 건 다르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팀장님께 돌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고, 그래서 내가 화가 났다까지. 물론 살짝 그렁그렁하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팀장님이 더 화를 내셨고, 그렇게 그분은 우리와 작업을 하지 않게 됐다.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듣더니 굉장히 흡족해하셨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감정을 분출하라는 건 아니에요. 짜증과 화는 명확히 달라요. 타당한 근거로 내가 기분 나빴음을 표현하는 건 절대 나쁜 행동이 아니에요."
"말하면서도 뭔가 마음이 안 좋았어요."
"기분이 어땠는데요?"
"말해서 시원하기도 하고. 선생님이 알려주신걸 잘 써서 뿌듯하기도 하고. 근데 팀장님이 기분 나빠 하시진 않을까 좀 찝찝했어요."
"왜 기분 나빠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요. 제가 문제를 만들어서?"
"이 세상은 긍정적인 감정만 표현하면서 살 순 없어요. A씨가 타당하게 화가 났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팀장님과 함께 건설적으로 풀어가야 하는 거예요. 모든 걸 피한 채 긍정적인 척 사는 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아요."
"맞아요. 말해서 상황은 나아졌으니까요."
"그럼요. 화를 내는 것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에요."
그날 상담을 다녀와서 쓴 일기는 이랬다.
예전의 나였다면 또 울고 아무말도 못했을텐데. 태어나서 말을 배우고, 젓가락질을 배우는 것처럼 오늘 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한 걸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