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내년 생일이 당연히 오지는 않는다 #4

by 진동글

다음날 아침, 몸이 안 좋아 휴가를 쓰겠다고 팀장님께 연락드렸다.


어기적 어기적 머리를 감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너무 급했나, 상담료 많이 비쌀 텐데, 나 정신병인가, 오늘은 괜찮은 거 같은데 예약 취소할까.


노쇼를 할 수는 없으니 집을 나섰다. 상담소에 들어가기 전,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헤이즐넛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이런저런 걱정이 사라졌다. 헤이즐넛에는 마약 성분이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기분이 갑자기 좋아져도 되나. 조울증도 있는 건가. 헛생각을 하며 상담소가 있는 건물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건물을 오르면서 조금은 허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믿을만한 건가, 비교해 볼 것을 그랬나.







문을 여니 누가 봐도 따뜻한 인상의 안내데스크 선생님과 두 마리의 고양이가 나를 맞이했다.


"오늘 10시에 예약한 A인데요."


"원장님이 아직 안 오셔서, 검사지 주고 가셨으니 이거하고 계시면 되어요."


검사실이라고 쓰인 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 많은 종이를 작성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긴장이 좀 풀렸다. 똑똑하는 소리와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먼저 원장님께 검사지를 드려야 한다면서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원장님은 어떤 분 일지 상상했다. 정신과 의사 혹은 상담사이실 테니 50대의 안경 쓴 여자분일 것 같다는 나름의 결론에 다다랐을 때 선생님이 다시 들어오셨다.




원장실에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의 사람이 있었다. 원장님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 40대 정도의 남자분이셨다. 눈꼬리가 처져 있어 어쩐지 엄청 덩치 큰 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커피 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들고 계시네요!"


"아, 그런데 검사하면서 거의 다 먹어서요~ 조금 긴장되니 한 잔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럼요. 캡슐 종류도 엄청 많답니다. 아메리카노, 라떼 어떤 쪽이 좋으세요?"


"아이스를 먹었으니 따뜻한 라떼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따뜻한 라떼를 호호 불었다.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무엇을 물어보실지 어쩐지 긴장이 됐다.


"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뭐부터 말해야 하지 살짝 버퍼링이 걸렸다.


"어제 벽이 갑자기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벽한테 잡아 먹힐 것 같았어요."로 말을 시작했다.


정말 두서없이 이것저것 다 말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았을 때의 불안함, 아빠와의 관계, 엄마아빠의 성격,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말 그대로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리액션만 하며 한참을 듣던 선생님이 처음 물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엄마가 걱정되었어요. 엄마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았어서."


"오, 그랬구나. A씨 기분은 어땠는데요?"


"동생들한테 어떻게 말할지 걱정되었어요. 동생들하고 나이 차이가 꽤 나거든요. 동생들은 아직 어려요."


"그렇구나. 그럼 엄마 말고, 동생들 말고, 다른 사람 말고. A씨는 기분이 어땠어요?"


"...."


말문이 막혔다. 내 기분이 어땠더라.





"슬펐어요."


한참을 생각하고 대답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슬프기만 했어요? 또 어땠어요?"


"....."


또 말문이 막혔다. 이제 눈물은 줄줄 흐르기 시작해서 닦지 않고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화가 났어요. 아빠를 늦게 발견한 경비아저씨도 미웠고, 아빠를 고치지 못한 의사 선생님도 싫고, 왜 우리 아빠가 죽어야 하는지 세상이 싫고 다 싫었어요.

아빠도 미웠어요. 이렇게 다 두고 가면 어떡하라는 거야. 나를 이렇게 갈기갈기 찢는 이 모든 상황이 미웠어요.

그리고 내가 제일 싫었어요. 아빠가 죽었는데 아빠를 원망하는 제가 제일 싫었어요."


저 말들을 뱉는 데 꺼이꺼이 울면서 하느라 한참이 걸렸다.







한참을 울고 원장님을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을 수 있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원장님이 말을 시작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기들은 평소와 다른 감정을 느끼면 울음을 터뜨려요. 배고파도 울고, 기저귀가 축축해도 울고, 잠이 와도 울고. 슬픈 게 아닌데도 표현 방법을 우는 것 밖에 모르니 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원장님은 잠깐 커피잔을 만지는 내 손을 바라봤다.


"A씨도 감정 표현에 있어서는 갓난아기나 다름없어요.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하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고, 슬플 땐 울어야지 건강한 거예요. 그런데 A씨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니 화나도 울고, 짜증이 나도 울고, 답답해도 울고. 그런데 정작 슬플 땐 울지 못해요."


원장님의 말을 곱씹었다. 정확했다. 나는 감정의 변화가 있으면 눈물부터 흘렸다. 그런데 정작 아빠 장례식땐 울지도 못했다.


생각하는 듯한 내 얼굴을 보고 원장님도 잠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같이 아버지를 건강하게 보내봐요. 이건 아주 긴 여정이 될 거고, A씨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할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나누고, 집에 가서 계속 상담을 받을지 말지 생각하고 연락 줘요."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원장님과 아빠를 건강하게 보내주고 싶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바로 다음날, 다시 상담소를 찾았다. 원장님과의 다음 예약을 잡았고, 6개월치를 결제했다. 물론 금액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이건 내 생명줄이었다.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장에서 피티를 끊는 것처럼 마음이 건강해지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나를 다잡았다. 물론 꼬박 3년이 걸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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