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고장 났음을 인정하기
내년 생일이 당연히 오지는 않는다 #3
아빠라는 우주가 사라진 지 1년이 지났고 나는 괜찮아 보였다. 주변에서는 갑자기 아빠를 잃은 것에 대해 걱정 섞인 위로를 건네기도, 내가 어른스럽다고도, 더 다정해졌다고도 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여전히 남자친구가 곁에 있었다. 친구들도 가득했고 좋아하는 야구도 자주 보러 다녔다.
그렇지만 이때 나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이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생각했을 때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엄마 전화가 귀찮아 이따가 받아야지 했는데 엄마가 죽어버리면? 남자친구랑 싸웠는데 다음날 남자친구가 죽어버리면? 친구가 보자고 할 때 피곤해서 미뤘는데 친구가 죽어버리면? 상사의 부탁을 거절했는데 상사가 죽어버리면?
이런 의미 없는 가정을 습관처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선택에 있어서 기준은 내가 아닌 상대방이었다. 내가 힘들어도 상대에게 좋은 일들을 마구잡이로 해나갔다. 나는 굉장히 타인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타인의존적인 성향은 내 안에 물들어가던 회의주의로 더 극대화되었다.
열심히 살면 뭐 하지. 내일이라는 것이 이다지도 허망하고 불확실한 것임을 알았는데. 내가 치열하게 살고 있어도 길 걷다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자다가 죽을 수 있는데 말이다.
내가 죽고 나서의 고통은 나는 못 느낄 테니,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때 내가 느끼는 고통이라도 줄여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빠가 죽고 느꼈던 무수한 후회들을 떠올리며 한 톨의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상대를 생각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챙기지 못해 내가 할 후회를 걱정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혼자 남은 엄마가 걱정되어 매일매일 전화를 했지만 사실 딱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퇴근 중이다, 밥 먹었냐, 별일 없냐 늘 똑같은 것들만 물었다.
그리고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아도 매주 금요일 집에 내려갔다. 내려가서 특별히 뭘 한 건 아니지만, 티비를 보며 엄마랑 잠들고 엄마가 다니는 교회에 같이 나갔다. 교회는 싫어도 엄마가 나랑 가는 걸 좋아하니 꾹 참고 나갔다. 주말을 엄마와 보내고 일요일에 서울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퇴근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금요일이니 이제 퇴근하고, 몇 시 차를 탈거라고 말하려 했는데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연결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는 늘 전화를 받는데, 이상했다.
회사 정문을 나서면서, 지하철역에 교통카드를 찍으면서,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외버스에서 내리면서 총 네 번을 걸었음에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온통 깜깜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 불을 켜고 쇼파에 앉아있는데 집이 순식간에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앞, 뒤, 왼쪽, 오른쪽 사방의 벽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둘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랑 연락되냐는 물음에 동생은 엄마 오늘 대만 가는 날이라고 잊었냐고 했다. 그제야 엄마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기분전환하고 오겠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엄마가 괜찮음을 알았으니 몸이 나아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손만 떨렸는데 어느새 몸도 떨렸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전쟁 나면 어떡하지. 교통사고 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엄마도 죽으면 어떡하지.
계속 떨리는 손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나 정상이 아니잖아?
다들 내가 괜찮아 보인다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이건 나 혼자 해결할 수 없겠다.
시계를 보니 지금 나가면 서울 가는 막차를 탈 수 있었다. 터미널에 가는 택시를 잡고 집 근처 심리상담센터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내일도 예약되나요?"
"내일은 예약이 꽉 차 있어서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죄송한데 선생님 벽이 너무 좁아요. 이렇게 있으면 제가 찌부가 되지 않나요? 지금이라도 가야 될 것 같아요. 벽이 너무 좁아요."
"잠시만요."
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한참뒤에 돌아왔다. 다른 선생님들은 다 예약이 차있고 원장님이 봐주시겠다고 한다며 내일 시간이 언제 되냐 물었다.
뭐 다른 곳과 비교해 볼 생각도 안 했다. 그냥 원장 선생님이 가능하다는 가장 빠른 시간으로 예약을 잡았다. 벽이 좁다며 깔려 죽냐는 내 질문에 선생님은 괜찮다고 내일 보자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란 담담한 말투의 선생님과 전화를 끊고 나니 어느새 벽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