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도 나중에 애 낳으면… 걱정 많겠어요, 그렇죠?”
보조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깐 웃었다. 대답 대신 커피 한 모금으로 말을 삼켰다.
교실 한쪽에선 아이가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리듬도 없이, 그냥 반복해서.
그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걱정이 많죠. 안 하려고 해도, 안 되더라고요.”
특수학급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을 만난 지 몇 해가 넘었다.
아이들은 다정했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했다.
열심히 가르치고 나면 다음날 다시 제자리일 때도 있었지만, 그건 일이니까 괜찮았다.
그걸 감당하는 게 교사의 몫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칠 때가 있어도 다시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건
그 아이들의 부모였다.
면담 자리에서 아이가 아닌 엄마의 눈을 더 오래 본 날도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전달해야 하는 고단함의 표정.. 걱정의 눈빛.. 교사의 성향 파악하기 전까진 아끼는 말들...
자주 보다 마주 하다 보니,
‘나는…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몰랐을 땐 막연했다.
막연하니까 덜 두려웠다.
하지만 너무 많이 알게 됐다.
진단명, 원인 불명, 재활센터 대기 리스트, 보호자 상담일지, 형제 갈등.
정확히 알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걱정은 정교해졌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임신 전부터 준비를 했다.
꾸준히 운동을 했고, 식단을 챙기고 약도 꼬박꼬박 챙겼다.
좋다는 건 뭐든 해봤다.
카페인 줄이고, 술 끊고, 검사 결과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은 늘 불안했다.
‘그래도 만약…’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임신 후에는 더 조심스러웠다.
병원 가는 길마다 무거웠고, 밤마다 인터넷을 뒤졌다.
‘태아 기형 확률’, ‘산모 불안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걱정이 아이에게 미칠까 봐 또 걱정했다.
결국 걱정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또 스트레스가 됐다.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혹시… 당신은 장애 아이가 태어날까 봐 걱정돼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애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소중했고, 나는 누구보다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그 부모의 자리에 내가 선다고 생각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내가 지금 만나는 부모들처럼 끈기 있게, 단단하게 살아낼 자신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자신 없었다.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특수교사였고, 누구보다 장애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아이들과 부모 앞에서 그런 고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시간은 묘하게 이중적이었다.
장애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이 어딘가에서 하루하루 중심을 잡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 감정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통해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알았다.
"불안은 없애는 게 아니라, 불안해도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는 것."
오늘도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한 나에게 힘을 주기 위하여 조용히 다짐한다.
“내가 오늘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찾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찾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느끼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