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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수 May 12. 2023

시중드는 것처럼

섬김에서 권위가 시작된다~!

올해로 교감 3년 차에 들어선다. 교사에서 교감으로 나의 역할이 바뀔 때 나는 과연 어떤 교감이 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시대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에 따라 교감의 역할, 자세로 한 단어를 붙잡게 되었다.


섬김


섬김이란 무엇일까?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된다. 나이 어린 선생님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름만 부르는 것은 안 된다. 친근감의 표현으로 그럴 수 있겠지만 학교라는 곳은 엄연히 공적 장소이며 공적 시간 안에서 만나는 것이므로 철저히 호칭을 정확히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껏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행동에서도 섬김의 태도가 드러나야 한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고 나를 찾아온 선생님은 서 있는 자세라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내가 민감해서 그런가. 아니다. 결재를 하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생각을 전환하면 나를 찾아온 선생님을 마음으로 정중히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교무실에 있는 나를 찾아오는 교직원들을 의자에서 일어나서 맞이한다. 물론 호칭과 맞이하는 태도만으로 섬김을 실천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섬김의 진정한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최근 읽었던 대천덕 신부의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214쪽에 섬김의 정의가 잘 나와 있다. 이 글귀를 보며 무릎을 치게 되었다. 섬김의 정확한 뜻을 찾아낸 것이다.


"섬김(serve)이란 단어는 매우 인기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유교적 어휘인 봉사란 말을 더 좋아하는데, 봉사는 좀 더 우월한 사람이 하급자에게 허리를 굽혀 돕는다는 뜻입니다. 한편 '섬긴다'는 말은 마치 종이 그의 상전에게 시중을 드는 것처럼 하급자가 상급자를 받들면서 돕는 것 의미합니다"


우월한 지위에서 좀 더 우월한 마음으로 돕는 행위는 섬김이 아니라 봉사라고 한다. 반면 종이 상전에게 시중을 들듯이 받들면서 돕는 것을 섬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받든다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내가 만나는 교직원들과 학생, 학부모들을 '섬김'의 자세로 대한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배알이 뒤틀릴 수도 있다. 섬김을 베푸는 사람의 모습을 역이용하는 교활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섬김이라는 가치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실천 불가능한 가치일 수 있지만 최대한 흉내라도 내 보면 어떨까 싶다.


2021년 12월 교감의 자세와 역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책을 낸 적이 있다.

『교사여서 다행이다』. 조금이나마 섬기고자 커피를 손수 내려 직원들에게 대접했던 교사 시절의 모습도 담아냈고 시골 분교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면서 섬겼던 모습도 담았다. 신규 교감으로서 최대한 겸손하게 학교 일을 해 내려고 했던 일 년의 생활을 담아내기도 했다.


이제 교감 3년 차에 들어선다. 교만하기 쉬운 시기다. 나를 낮추는 작업이 순간순간 필요할 것 같다. 알고도 못 본 척 하기, 잔소리하지 않기, 말하기보다 듣기를 속히 하기, 대접받기보다 희생하기 등등 스스로에게 계속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리더십의 유형 중에 섬김의 리더십이 있는 것으로 안다. 진정한 권위는 섬김에서 나온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저자 김훈 작가는 섬김에 대해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권위섬김과 희생, 책임과 의무에서 나온다. 형식적 권위는 위기 앞에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밖에 없다. 사대부들이 수성하고자 했던 그들의 권위로 대다수의 민초들이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리더십은 신속 정확한 판단과 더불어 끊임없는 성찰, 앞을 내다보는 안목에 달려 있다고 본다"


거창고등학교의 도재원 전 교장선생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은 차이를 우열로 보지 않는 것이라고 훈화하셨다고 한다.

섬김의 기본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라고.


불교 용어 중에 분소의라는 말이 있다. 죽은 자의 시체를 감쌌던 버리는 천으로 지은 옷분소의라 하는데, 분소의라는 말에는 버리는 옷, 가장 천한 차림이란 뜻이 있다. 중생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중생들의 똥을 닦아주는 '섬김과 겸허'의 정신이 숨겨져 있기도 한 말이다. 『개똥찌지빠귀를 위한 변론 』25쪽


섬김이라는 말을 감히 내뱉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섬김의 본 뜻을 실천하는 교감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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