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little ice age
Rijksmuseum (20221218)
집안 분위기라는 게 있다면 나는 자랄 때 크리스마스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 가정에서 자랐다. 대대로 기독교라서 크리스마스이브 교회 행사들도 기억에 남지만, 집안의 분위기를 만드는 엄마는 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공을 들이셨다. 천장까지 닿을 만큼 큰 트리 꼭대기에 노란 별을 달고 알록달록한 작은 전구 라이트를 켜놓으셨다. 멀리서도 우리 집 거실에서 반짝이는 트리가 보였다.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일 년을 사나 싶을 정도로 유난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식기는 물론이고 크리스마스 때만 꺼내는 예쁜 포크도 따로 있었다. 매년 해외에 거주하는 친척들에게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는데, 당시 Hallmark cards는 디자인 천재 회사였고 카드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정말 예뻤다. 카드는 예쁜 벽돌집과 굴뚝, 하얀 눈, 포인세치아꽃과 전나무를 소재로 행복해 보이는 계절을 담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예쁜 곳이 존재할까 싶은 그림들을 보며 지구 반대편 세상을 동경했던 거 같다. 아직도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감을 주던지 마음에 남아있다.
보통 유럽여행은 계절 좋을 때 다니지 겨울에 잘 안 가는데, 우리는 어쩌다가 한겨울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프스 산자락에서 본 마을의 모습과 기차를 타고 가며 통유리 너머로 본 전원의 모습, 기차역에서 까먹던 군밤, 따뜻한 뱅쇼, 그 추운 날씨에 꽁꽁 싸매고는 추워서 맘껏 돌아다니지는 못해 아쉬웠지만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특히 루체른의 산에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본 아주 큰 전나무들은 크리스마스 나무 그 자체였다. 와우… 정말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마을이 존재하는구나. 정말 예뻤다. 핀란드 산타마을도 언젠가 꼭 한번 겨울에 가보고 싶어서 리스트에 올려뒀다.
겨울여행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 거 같다. 물론 꽤나 불편하긴 하다. 옷도 무겁고 부피가 나가고, 짐도 많고, 요즘의 유럽은 이상기온으로 눈은 안 오고 비가 가끔 내려서 축축하게 젖고. 그렇지만 겨울여행은 장점도 많다. 일단 관광객이 없어서 미술관 관람하기에 너무 좋다. 그 좋은 명화들을 놓고 나 혼자 서서 바라보는 느낌이란… 이런 호사가 없다. 뮤지엄 카페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가서 여유 있게 즐길 수가 있다. 또 좋은 호텔의 가격도 많이 저렴해진다. 미술관 보고 나면 더 다닐 힘도 없어서 맛있는 저녁 잘 먹고 들어와서 포근한 이불 덮고 꿀잠 자면 최고로 좋다.
이렇게 겨울을 즐길 줄 아는 나한테 너무나 와닿는 작가가 있으니 네덜란드 작가이고, 겨울 풍경만 그리는 Hendrick Avercamp (1585-1634)이다. 이 작가는 네덜란드 황금기에서는 초기에 속한다. 그래서 다른 풍속화가들의 그림과는 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하다. 황금기 작가들은 대체로 풍속화를 많이 그려서 화풍도 좀 비슷비슷하고 그림만 봐서는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한 번에 알아맞히기가 쉽지 않은데, 이 작가의 그림은 어느 누구의 그림과도 비슷하지가 않다. 이런 류의 그림은 무조건 이 작가의 그림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개성이 뚜렷하다. 그리고 작품수도 100여 개나 남아있어서 유럽의 미술관에서 꼭 한두 점씩 반갑게 만날 수 있다. 여름에 만나도 반갑고, 가을에 만나도 반갑다.
그런데 Rijksmuseum에서 당연히 Hendrick Avercamp 그림인 줄 알았는데 예상밖으로 다른 작가의 그림인 적이 딱 한번 있다. Hendrick Avercamp과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Jan van Goyen이라는 작가인데 그는 풍경화가였다. 주로 바다풍경을 많이 그렸고, 숲, 강, 농민, 마을등 풍경의 주제가 아주 다양하며 무려 1,200점의 그림을 남기었다. 그는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상도 했고 튤립과 부동산 투자 등에도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황금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이 작가가 그린 겨울 풍경 중에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이 있는데 첫눈에 딱 보면 Hendrick Avercamp의 작품이다. 몇 번이고 정말 아니라고? 되물으며 그림을 들여다본다. 자세히 보면 좀 다르긴 하다. 이 한 점을 제외하고는 안심하고 다 Hendrick Avercamp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Hendrick Avercamp의 그림은 사이즈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그 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다. 멀리 있는 사람까지 다 세어보면 백명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작은 사람들을 어찌나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표현을 했는지 들여다보는 게 너무 재미있다. 다양한 목적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손잡고 스케이트를 타는 뒷모습으로 연인인지 부부인지 관계도 말해준다. 얼음 위에서 콜프를 하는 사람들, 썰매 타는 사람들. 숨어서 용변을 해결하는 사람도 있고, 술 취한 사람도 있고, 일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있다. 그중에 반려동물과 가축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도 등장한다. 묘사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다. Hendrick Avercamp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서 북동쪽으로 좀 떨어진 Kampen에서 자랐는데 <Kampen의 벙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봐서 말하는 거와 듣는 거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 추측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표현이 이렇게 뛰어날 수가 없다. 아무래도 듣는 것과 말하는 게 자유롭지 않았기에 모든 표현력이 다 손끝으로 집중되었을 거라 생각해 본다. 거리감을 색으로 표현해서 앞쪽의 나무와 소재들은 어둡게 자세히 그리고 뒤로 갈수록 흰색 분홍색 회색을 밝고 옅게 쓰면서 원근법을 나타내고 있다.
Hendrick Avercamp의 작품들은 Rijksmuseum와 Mauritshuis Royal Picture Gallery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런던 The National gallery에서 만난 작품이 제일 예뻤다. 8 각형의 프레임에 들어있는 원형 그림인데, 제목은 A Winter Scene with Skaters near a Castle이다. 앞에 있는 나무가 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주며 겨울나무라서 앙상하지만 가지들이 풍성하게 화면을 채워준다. 이 그림이야 말로 작은 사이즈 안에 사람이 백 명은 들어 있을 거 같다. 왼쪽 편에 스케이트 타는 어린아이들 모습이 참 예쁘다.
빙하기는 아니지만 추운 시기가 지속되었던 중세 소빙기 (little ice age)는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는데 이 당시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이 안 간다. 그림 속에서 보는 거처럼 저 정도 옷을 걸치고도 겨울을 살아낼 수 있었다니 안쓰러운 마음으로 자세히 보니 다행히도 다들 장갑은 꼈구나. 온갖 털옷은 다 껴입고도 춥다고 하는 요즘 사람으로서는 이 풍경이 그림이니까 아름답지, 내가 저 시대에 살았으면 추워 죽겠는데 웬 스케이트를 탄다는 말인가 싶다. 안 그래도 이번 여행 중에 덴마크 공항에서 탔던 택시 아저씨는 8년째 쌓이는 눈을 보지 못해서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하다고 해서 지구가 정말 많이 아프구나 실감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 어렸을 때도 아파트 건너편 공터 논밭 자리에 겨울이 되면 스케이트장이 생겨서 놀러 가던 생각이 난다. 핫초코와 떡볶이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유럽이나 우리나라나 이상기온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스케이트장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나 보다. Rijksmuseum 미술관의 뒤쪽으로는 반고흐미술관 가는 방향으로 연결되는데 여름에 오면 초록 잔디밭이 쫙 펼쳐져서 예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져서 또 다른 분위기이다. 미술관을 배경으로 스케이트장과 함께 사진에 담으면서 보니 Hendrick Avercamp 그림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겨울여행도 참 좋은 거 같다. 여행을 다녀와서 얼마 후에 친정 아빠 방에 Hendrick Avercamp의 그림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아빠도 평생 엄마의 크리스마스에 익숙해지셨구나. 하고 많은 그림들 중에서 이 그림이 맘에 드셔서 갖다 놓으신 거 보니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