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y golden age Jul 17. 2023

Tate Britain

런던: Ophelia

Tate Britain (20221206)


딸은 한국에서 영문과에 입학을 했었다. 영어 성적이 나와서 영문과를 들어가긴 했으나 영어랑 영문학은 달랐다. 영문학 공부가 가능한 지성과 감성이 부족하여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때문에 학교를 못 다니겠다는 황당한 괴변과 함께 미술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싶다고 하기에,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을 빠르게 인정하고 서둘러 입시 미술을 준비하여 영국의 미술대학교에 지원했다. 돌이켜보니 나의 경우에는 적성보다는 진학이 우선이었기에 미술을 전공으로 선택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뒤늦게 유화도 그려보고, 크로키도 해보고, 전시를 찾아다니고, 아트페어를 다니며 그림 구매도 해보는 등, 항상 아트에 눈과 귀를 열고 자아만족을 하고 있었다. 나의 정보력과 에너지를 다 쏟아 뒷바라지한 덕분인지 무난하게 영국의 미대 여러곳에 합격할 수 있었다. 영국의 현대 미술을 이끈 Young British Artists 들을 탄생시킨 학교인 Goldsmiths Fine Art course로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고, 2017년 여름부터 런던에서 공부하고, 학부를 마치고 나서는 Sotheby’s Institute of Art 대학원 과정을 거쳐 졸업을 앞두고 있다.



런던에 처음 갔을 때부터 코스처럼 꼭 방문하는 곳들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Tate Britain 미술관이다. 위치가 좀 애매한데 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다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 앞에서 템스강 쪽으로 나와서 공원 산책길로 걸어가는 편이 좋다. 런던의 도로 사정은 정말 열악해서 대중교통보다는 걷는 게 빠르고 걷는 거보다는 자전거가 빠른듯하다. 바쁜 일정이 없으면 대부분 걸어 다니게 되는데, 다니다 보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의 범위가 꽤 넓어져서 걷기 기록을 경신하곤 한다.



이 미술관도 1897년도에 영국 국립 미술관으로 세워졌고, 1932년부터 처음 설립한 Henry Tate경의 이름을 따서 Tate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Tudor 왕조 시대인 1500년대부터 현대까지의 영국 작품들을 중심으로 가지고 있다. 특히 JMW Turner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고, 19세기 영국의 인상주의 작품들과 현대 작가인 David Hockney, Francis Bacon, 더 최근 작가인 Tracey Emin의 작품까지 너무나 좋은 작품들이 많은 곳이다.



Tate Britain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Ophelia> (1851-1852)이다. 가로로 누워있어서 그림이 클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한 실물은 작은 편이다. 시대적 배경과 그림의 스토리를 다 떠나서 일단 너무 잘 그렸다. 누워있는 오필리아의 얼굴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나무와 풀과 꽃들의 생생함. 실제보다 훨씬 더 리얼하다. 그렇다. 이 작가는 정말 잘 그리는 작가이다.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어서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11세에 Royal Academy of Art에 입학한다. <Ophelia>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4막 7장에서 애인 햄릿에게 아버지가 살해되자 정신이 나간 상태로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을 그린 거다. 이 당시의 화가들은 셰익스피어의 소재들을 좋아했고 특히나 Ophelia는 다른 화가들도 여러 번 그린 주제이다. Ophelia 주변의 꽃과 나무들은 작가가 5개월 동안 야외에서 작업하며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한 식물들이다. 나는 식물 이름들을 잘 모르지만, 여기에 나온 꽃들은 그냥 그려진 게 아닌 거 같다. 아, 이 작가의 특징은 철저한 계획성이라고 했다. 그 꽃들도 계획에 의해서 선택되고 배치되었나 보다. 버림받은 사랑인 데이지꽃, 헛된 사랑의 팬지, 순결 또는 죽음을 의미하는 제비꽃, 죽음을 의미하는 양귀비 등, 모두 다 의미 있는 꽃들이다. 먼저 야외에서 호수 주변의 꽃과 나무와 풍경을 완성한 후에 스튜디오로 가지고 들어와서 물속에 누워있는 Ophelia를 그렸다고 한다. 물에 떠 있는 모습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모델을 욕조에 담가놓고 실제로 보면서 그렸다. <Ophelia>와 나란히 걸려있는 <Mariana> (1850-1851)도 같은 작가가 비슷한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파란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는 Mariana의 모습과 스테인글라스의 디테일까지 색감과 표현력이 너무나 대단하다. 이 작품도 셰익스피어의 연극 <Measure for Measure>의 내용을 묘사했다. 연극에서 젊은 Mariana는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난파선에서 지참금을 잃어버리고 약혼자에게 거절당하여 힘든 마음으로 서 있는 장면이다. 두 작품 모두 셰익스피어 연극의 한 장면이라고 하니 전체 스토리를 알고 보면 더 감동스러울 듯하다. 내 딸도 참… 셰익스피어를 피해 미술로 전공을 바꿨으나, 결국에는 셰익스피어의 나라를 제 발로 찾아갔고, 그림에서 조차 셰익스피어를 피해 갈 수 없구나. 너도 운명으로 생각하렴.



작가는 1870년대부터는 풍경화도 많이 남겼고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가장 비싼 비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도 오점을 남겼으니 젊은 시절 그린 작품들이 세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자신을 보호해 주고 감싸주었던 영향력 있는 비평가 John Ruskin의 아내 Effie Gray와 사랑에 빠진 게 된 거다. 결국 Effie는 신뢰가 없던 6년간의 결혼 생활을 무효화시키고 (이혼이 아니고 무효가 된다니, 좋은 시스템이었다) Ruskin과 헤어진다. 운명이었던지 Effie는 결국 Millais와 결혼을 하고 자녀를 8명이나 낳고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엔딩 스토리이다. 어찌 됐건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은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여왕이 자신의 초상화가로 Millais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스토리는 유명하다. 이 빅토리아 시대의 삼각관계는 연극과 오페라로 각색되었고, Effie Gray라는 영화 (2014)도 나와있다. Royal Academy의 회장이기도 했던 화가 Millais가 사망한 후에 웨일즈왕자 (나중에 에드워드 7세)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며 동상을 의뢰하여 1905년에 Tate 미술관 전면에 Millais의 동상을 세웠다. 지금은 미술관 건물 뒤쪽에서 Millais 동상을 만나 볼 수 있다. 왕이 동상까지 세워준 작가라니 그의 명성이 대단하긴 했나 보다.



이 미술관은 연대가 비슷한 작품들로 묶어서 배치했는데, Tudor 왕가의 웅장한 초상화가 많이 있는 방이 있다. Tudor는 영국의 역대 왕조중 하나로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졌었다.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했고 헨리 8세로 이어지면서 그 유명한 헨리 8세의 결혼사와 종교사가 결합된 역사를 남기게 된다. 그의 딸들인 Mary I 세와 Elizabeth I 세가 통치하던 시대적 배경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등으로 만들어졌고, 특히 Elizabeth I 세는 초상화가 여러 점 남겨져서 그녀의 이미지는 각인되어 있다. 석고같이 하얀 피부, 큰 진주 귀걸이, 화려한 러프, 옷에 달린 진주 보석과 여러 겹의 진주 목걸이 등등, 여왕의 이미지는 인상 깊게 남는다. 1603년에 Elizabeth I 세가 사망한 후에 James I 세와 Charles I 세 시기까지의 그림들은 권력 그 자체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그림에서 화가의 이름은 unknown으로 처리되어 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주로 북유럽에서 이민온 사람들로,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난민으로 입국한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에 의해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종교개혁이 일어나며 엄청난 종교탄압이 있었고, 종교용으로 만들어진 예술품들은 파괴되던 시기가 있었다. 예술가들은 이때부터는 종교화가 아닌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이민온 예술가들의 그림 실력을 보면 현대의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생각나지만, 당시의 그림 재료 상태를 감안한다면 비교 대상이 아닐 거 같다. 그림 속의 의복과 레이스, 주얼리 등의 화려함 역시 장인이 손수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텐데 그 고급짐과 콸러티는 요즘의 드레스나 한복의 자수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거 같다.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대부분 다 알 수는 없었고, 그저 화려한 의복에 감탄을 했다. 그 의복을 입은 사람이나 만든 사람 그린사람 모두 다 역사에 남을만하다. 이 시대의 미의 기준은 Elizabeth 여왕의 스타일을 따라 창백한 안색과 붉은 뺨과 입술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주요 적은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다르게 매우 영국사람으로 보이도록 치장을 했다. 또한 여왕이 통치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의 패션이 중요했고, 패션에도 사회적 지위에 따른 스타일과 재료 사용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원단이 있었고 색상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금사가 들어간 원단이나 실크와 벨벳소재, 그리고 퍼플색상은 여왕과 여왕의 직계 가족정도만 입을 수 있었다. 정교한 의복의 디테일을 보면서 예쁜 부분의 사진을 찍어보았다.



이 시대에 Elizabeth I 세를 담은 똑같은 초상화 세 점이 있는데 Armada Portrait이라고 칭한다. 이 그림의 배경은 1588년에 스페인의 Armada 함대 130척의 침략에 맞서 영국이 해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그림으로 Tudor의 여왕과 여러 심벌들을 담아서 묘사하였다. 당시 Tudor 궁정에는 화가들과 초상화 전문 화가들을 고용하여 예술팀을 운영했는데 이 세 점을 작업한 화가 개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고, 이 그림을 남기는 배경과 여왕을 칭송하는 목적만이 중요했던 거 같다. 당시 50대 후반이었던 여왕이 통치기간 동안 다른 대륙의 남성 지도자들과 동등한 힘을 가진 강력한 왕으로 보이길 원했고 경외심을 갖도록 상징적인 디테일들을 계획하에 넣어서 제작하였다. 여왕의 의상에서 진주가 많이 보이는데, 진주는 독신이었던 Elizabeth I 세의 정조와 순결을 상징한다. 여러 줄의 진주 목걸이가 예쁘다. 아마도 1568년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의 컬렉션에서 구입한 진주일 거라 한다. 오른쪽 아래의 인어는 음모와 악의 이미지로, 여왕은 등을 돌리고 있다. 여왕의 오른쪽 손은 아메리카 대륙을 보여주는 지구본에 올려져 있고 영토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뒤쪽의 바다풍경에는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들이 폭풍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여왕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황실 왕관은 강력한 군주제를 상징하고 오른쪽 아래의 불사조는 부활과 인내와 영생의 상징이 되는 신화적인 새로 여왕의 장수를 상징한다. 달도 진주와 마찬가지로 처녀성과 순수함을 비유한다. 여왕의 의복과 러프와 레이스, 헤어스타일, 머리의 장식, 소매와 금사로 수놓아진 태양, 우아한 장갑, 타조깃털 부채 등 여왕을 치장하는 모든 것이 매혹적이다. 이 그림 이외에도 여왕의 그림에 등장하는 개는 충실함의 상징이고 Tudor 왕족은 그레이하운드를 좋아했다고 한다. 보통 올리브 가지는 평화를 상징하며, 펠리컨은 신하와 국민에 대한 여왕의 모성애를 보여준다고 한다. Armada Portrait의 3가지 버전은 Woburn Abbey, The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Royal Museums Greenwich에 전시되어 있다. 여왕이 모델로 포즈를 취하는 것을 안 좋아해서 완성된 한 작품을 보고 여러 장을 복제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아래의 사진은 세 점의 그림이 처음으로 430년 만인 2020년 2월부터 8월까지 Royal Museums Greenwich의 Queen's House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었던 사진이다. The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은 몇 년 간의 공사를 끝내고 2023년에 재개관을 하였으니 다음번에 방문해서 여왕의 초상화를 만나보고 싶다.



George Gower's Armada Portrait of Elizabeth I (1588) at Woburn Abbey
at the Queen's House, Royal Museums Greenwich (1588)
National Portrait Gallery version (unknown, 158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