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Ms. Pretty & Mr. Brown
The British Museum (20230118)
대영박물관 (혹은 영국박물관이라고 한다)에 처음 갔을 때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고대유물들을 관람하고는 남의 나라 거를 이렇게 가져와도 되나 언짢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언젠가 베를린에 가서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는 유물정도가 아니고 유적지를 통째로 뜯어 옮겨다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과거의 약소국에서 정직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란 나에게는 이것들을 어떤 경로로 가져온 건지 그 충격이 마음에 크게 남았었다. 게다가 너무 큰 대형 박물관 가는 거를 별로 안 좋아한지라 한번 가 본 걸로 족하지 싶어서 두 번은 안 간 거 같다.
이번에 런던에서 두어 달을 보내면서도 끝까지 대영박물관은 안 가고 버티던 중에 영화 한 편을 만나게 되었다. 제목은 발굴이라는 뜻인 The Dig로 영국 Sutton Hoo 발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존프레스톤의 소설 ’더 디그‘가 원작이다.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1938년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미망인 Edith Pretty는 남편과 함께 구입했던 사유지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려고 고고학자를 섭외하지만, 저명한 고고학자들은 이미 진행 중인 대규모 발굴 작업들을 서둘러서 마무리해야 한다며 새로운 작업을 거절한다. 이때 스스로를 발굴가라고 소개한 Basil Brown이 흔쾌히 발굴을 진행해 주기로 한다. 그는 전문 과정을 밟은 고고학자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발굴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며 감각적으로 익힌 뛰어나 전문가였다. 이들은 발굴 과정에서 험난한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뭔가 묻혀 있을 거 같은 둔덕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완벽하게 보존된 배 무덤 한 기를 포 함하여 투구 등 대량의 앵글로색슨 유물들을 발굴해 낸다는 스토리이다. 영화의 끝자막에 … his name appearing alongside of Edith in the British Museum’s permanent display. 나는 이 한 줄을 보고 런던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대영박물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정말로 전시가 되어있는지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박물관은 정말 웅장함 그 자체였다. 원래 이렇게 멋있었던가. 많은 걸 봐야겠다는 마음을 접고 와서 그런지 입구의 Great Court가 눈에 확 들어오면서 전체적인 천장의 모습이 궁금해져 뒷걸음질로 들어온 입구로 다시 되돌아가서 감탄을 하며 천장의 돔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한 명칭은 Queen Elizabeth II Great Court, 줄여서 Great Court라고 부른다. 1999년 9월부터 공사해서 2000년도에 재개관했다. 이 유리 지붕은 유럽에서 가장 큰 덮개이고 3,312개의 개별 유리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양이 같은 패널은 없다고 한다. 여유 있게 Great Court의 카페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잔 한다. 목적지를 향해서 정신없이 직진하다 보면 이 공간을 못 즐기고 지나쳤을 텐데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서 천천히 관람하니 참 좋다. Great Court 천장 아래 이곳 공간에서는 진귀한 조각품 12점도 볼 수 있다. 기원전 1400년도 Amenhotep 3세의 조각상과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왕의 조각상등 인류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조각품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한숨 돌린다.
이제 The Dig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찾아서 2층 41번 방 <Sutton Hoo and Europe AD 300-1100>으로 올라갔다. 우선 Sutton Hoo는 지역 이름으로 영국의 동남쪽 항구도시인 Woodbridge 근처 지역이다. 이곳에서 6-7세기의 묘지 두 곳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지를 Sutton Hoo라고 칭한다. 영화 속의 내용대로 Mrs. Edith Pretty는 발굴한 유물을 거의 다 대영박물관에 기증했고, 유적지는 영국 국민신탁(National Trust)에서 관리 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앵글로색슨족은 5세기에 유럽본토에서 영국으로 넘어와서 정착하였다. 그 이전의 영국땅은 고대 로마가 점령하였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앵글로 색슨족이 들어와서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문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the Anglo-Saxons)에 대해서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었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존해서 역사를 재구성하다 보니 Sutton Hoo 발굴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앵글로 색슨은 12세기에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7개의 왕국으로 나뉘는데 그중에 하나가 동앵글왕국 (The Kingdom of the East Angles)이고 이 또한 Sutton Hoo 발굴로 퍼즐조각이 많이 맞춰졌다. 7세기초 동앵글왕국의 Rædwald는 강력한 왕이었고 그가 통치하던 이 시기는 평화로웠다고 한다. Rædwald 왕은 처음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아마도 그가 Sutton Hoo 배무덤의 주인일 거라고 학자들은 믿는다. 그는 대략 624년경에 사망했다. 이런 이유로 미망인 Pretty와 Brown이 불굴의 의지로 발굴한 Sutton Hoo가 우리에게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열쇠가 된 중요한 사건이고 장소였던 거다. 여기서 잠깐, 단순 비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가 414년도에 세워진 것인데, 앵글로색슨족에게 6-7세기까지 문자가 없었다고 하니 의외이다.
이들 발굴팀이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둔덕을 파헤치니 길이가 27미터나 되는 배의 흔적이 그대로 나왔다. 배의 나무판자는 썩어 없어졌지만 땅에 철제 못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배의 중앙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방이 있었고 그 안에서 출토된 보물들은 화려하고 정교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세상에 나왔다. 유럽에서 발굴된 중세 유물들 중 가장 좋은 상태로 출토되었다고 한다. 정말 전시품들의 상태가 그렇게 오래된 유물들 같지 않게 상태가 훌륭하다. 세공도 놀라울 정도로 디테일하다. 전시품 중에는 투구가 있는데 이것은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의미의 투구가 아닐 거라고 한다. 아마도 왕의 왕관으로 사용되었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실제 모습과 디자인에서 풍기는 기품이 압도적이다. 특히 눈썹과 코 콧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정교한 무늬는 볼륨감을 더해주는 거 같다. 전시품 중에 금세공이 된 팔찌가 있는데 이음새 부분의 십자가 모양이 기독교 의미로 사용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냥 이곳을 방문하여 전시품들을 관람했더라면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쓰윽 지나쳤을 방인데, 영화 한 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렇게 꼼꼼하게 살펴보며 전시실 한 곳을 마스터하고 보니 너무나 뿌듯했다. 이 방이 역사적으로 중요했던지 어린 학생들이 질문지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답변을 적고 있는 듯했다. Sutton Hoo 전시실을 뒤로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대충 쓰윽 보면서 직진을 해나가다가 대영박물관의 꽃인 이집트 전시실로 들어갔다. 역시 다양한 미라가 반겨주고 있었고, 교복을 입은 어린 꼬마 학생들에게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라 주인공들은 본인 사후 5000년이나 지나서 고향에서 수억만 리 떨어진 런던 한복판의 전시실에 누워있게 될 줄 알았을까. 어디선가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그들의 인격을 위하여 조용히 다시 고향땅에 묻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을 기약하고 박물관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