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Boogie-Woogie 리듬을 좋아하던 몬드리안
Kunstmuseum Den Haag (20221227)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우선 반고흐가 생각나고, 베르메르도 떠오른다. 그리고 렘브란트! 그리고 또 한 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Piet Mondrian이다. 그 유명한 Mondrian의 빨간 노랑 파란색이 들어간 그림은 뉴욕의 현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에, 뉴욕출신인가 싶었다. Mondrian의 그림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이 헤이그 미술관 <Kunstmuseum Den Haag>이다.
이 미술관이 위치한 곳에는 여러 미술관들이 모여있다. 어린이를 위한 미술관, 사진미술관, 야외정원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근현대 미술과 패션 장식미술등 16만 점을 보유한 쿤스트뮤지엄이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의 외관은 노란빛 벽돌로 딱딱한 직사각형의 조합으로 디자인되어 있어서 최근에 지은 건축물일 거라 짐작했는데 1931년-1935년 사이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었다. 유럽에서 이 정도면 최근 건물이긴 하다. 미술관은 1866년에 설립되었고, 건물은 이후에 새로 건축되었다. 미술관은 Hendrik Berlage (1856-1934)라는 유명한 네덜란드 건축가가 디자인했는데, 이 분이 Hoge Veluwe 국립공원 안에 있는 Kröller-Müller Museum의 전신인 Hunting Lodge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사각형 구조의 미술관 중앙은 중정처럼 비어 있고 그곳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공간이 아주아주 넓다. 그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사면은 전부 다 전시실이고 비어있는 공간이 없어서 꽉 찬 전시를 보게 된다.
이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든 생각은 정말 놀랍게 크다였는데, 루브르 박물관처럼 크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술관 안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기획전이 한 열개는 되는 듯했다. 외관을 봤을 때는 공간이 그렇게 넓을 거라 예상 못했는데, 내부로 들어가면 압도적인 규모에 놀라게 된다. 델프트 블루 도자기부터, 유리공예, 인형의 집, 인상파 회화, 근현대 회화뿐만 아니라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과 패션 소품까지 다양하고 방대한 소장품도 놀라웠지만, 동시에 이렇게 많은 기획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미술관은 처음 본 지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미술관은 연간 25~30개의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하니, 별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보고 나온 게 열개정도 되는 거 같다는 나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특히 패션 브랜드 BALENCIAGA 전시에서는 소장하고 있는 드레스들을 보여줬는데 거의 다 블랙 드레스로 기품 있고 멋진 컬렉션이었고 미술관에서 패션 전시라니 신선했다.
이 미술관의 자랑인 Piet Mondrian (1872-1944)의 작품들은 그의 대표작인 구성 디자인뿐만 아니라 초기의 풍경화와 인상주의 스타일 작품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도 초기에는 여느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풍경화와 꽃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탐구는 점차 추상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풍경화와 인물화도 추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추상스타일이 지나가고 나면 Mondrian은 대표 이미지인 신조형주의 (Neoplasticism)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창출하게 된다. 이 스타일은 형태보다는 선으로 표현을 하며, 수직 및 수평의 선과 순수한 기본 색상 (빨강, 파랑, 노랑, 흰색, 검정)만을 사용하여 작품을 구성한다. Mondrian은 이렇게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였고, 영적인 세계와 예술과의 관계를 표현한 거라 한다. 자세히 보면 테두리가 검은색인 그림도 있고, 회색인 것도 있다. 초기 작품은 분할하는 선을 무채색 (검정, 회색, 흰색) 위주로 사용하다가, 후기 작품에는 분할하는 선에도 컬러가 들어간다. 그마저도 3가지 색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특히 그는 수평과 수직의 선만을 고집하였다. 훗날 그의 친구이자 Der Stijl 이념을 같이 만든 절친 Theo van Doesburg과의 결별 이유는 그 친구는 사선을 인정하자고 주장했지만 Mondrian은 사선은 절대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차이였다고 한다. 그들의 기하학 그림은 비슷한 풍이지만 Doesburg의 그림에는 대각선이 사용되었고 Mondrian의 그림에는 절대로 대각선이 등장하지 않아서 알고 보면 구별하는 재미가 있다.
Der Stijl은 The Style이라는 뜻으로 1917년에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예술 및 디자인 운동이다. 이 운동의 창립자는 Theo van Doesburg이며, Mondrian, Bart van der Leck, Gerrit Rietveld 등 여러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참여하였다. Der Stijl은 기본적인 형태와 색상을 강조하며, 불필요한 장식이나 디테일을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들은 예술과 생활 사이의 경계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미술, 건축, 가구 디자인, 그래픽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신조형주의는 이후의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 모더니즘 등에 영향을 미쳤다. 이 미술관에 전시된 의자, 가구등의 결과물을 통하여 Der Stijl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Gerrit Rietveld는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 Der Stijl 운동의 주요한 멤버였는데, 1917년에 그가 디자인 한 "Red Blue Chair"는 지금 보아도 훌륭하다. 이 의자는 Der Stijl 운동의 핵심 원칙을 반영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직선을 사용하였고 순수한 색상(빨강, 파랑, 노랑, 검정)으로만 디자인되어 있다. 이렇게 그들은 혁신적인 디자인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냈고, 전통적인 형태나 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추구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도 탁월하며 현대의 디자인에도 영감을 주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가전제품 디자인에도 적용된 거 같다.
네덜란드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던 Mondrian은 1911년 39세에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의 입체파 스타일을 접하게 되며 화풍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의 그림은 이미 파리로 넘어가기 이전부터도 추상화로 넘어가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그린 <Evening: Red Tree, 1908>에서는 과도기적인 느낌과 절제된 색상을 볼 수 있다. 파리로 넘어간 해에 그린 <Evolution, 1911>은 3폭의 여성 추상화인데 이 작품은 인간의 모습을 그린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1914년에 잠시 네덜란드로 돌아왔는데 그때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1918년까지 네덜란드에 머무르게 되고, 그때에 Der Stijl을 결성하였다. 세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1938년까지 오랜 시간 파리에 머무르며 그만의 스타일로 작품을 쏟아내었다. 불안해진 유럽의 정세로 인해서 그는 잠시 런던에서 머물다가, 1940년에 네덜란드가 침공당하고 파리가 함락되면서 뉴욕으로 이주하고 비록 4년이지만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활동한다.
그가 파리 런던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특이한 점을 볼 수 있는데, 그는 회화에서만 구상 디자인을 남긴 게 아니었고 그의 생활공간과 작업실도 기하학 디자인으로 꾸며두었다. 수직과 수평, 그리로 절제된 색상에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일까. 남아있는 그의 작업실 사진을 보면 Der Stijl의 이상대로 예술과 생활에서의 경계를 없애는 것을 몸소 실천한 그의 집념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래지향적이며 현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의 업적을 느껴 볼 수 있고, 또 다른 면으로는 평생 수평 수직과 무채색 혹은 3가지 색상 안에서 갇혀 산 그의 인생이 조금은 갑갑하게 느껴진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평생 별다른 스캔들과 연애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20대 여성과 잠시 사랑하며 그때 처음으로 작업실에 초록 화분을 들여놨다는 여담이 전해지는 정도. 평생 작업실에는 꽃도 흰색꽃만 갖다 둘 정도로 정해둔 공식의 틀 안에 갇혀 살았던 삶이 아니었나 싶다. 같이 사는 사람이 수평 수직 그리고 몇 가지 색상만 고집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보통의 인내심과 이해심 아니고서는 사랑만으로는 함께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한 후에 그의 작업실을 정리하기 위하여 방문 한 친구 Harry Holtzman가 Fritz Glarner와 함께 남긴 스틸컷이 자료로 남아있고, 그의 스튜디오에 관해서는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2014년 영국 테이트 리버풀 전시회에서는 그의 스튜디오를 그대로 재연하였을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남겨진 뉴욕 사진에는 그가 작업 중이던 <Victory Boogie Woogie, 1942-1943>가 미완성인 채로 이젤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첫째로는 마름모로 캔버스를 배치했고 (이전에도 여러 작품에서 마름모 캔버스를 사용하긴 했다), 두 번째로는 수평과 수직선이 무채색인 단색이 아닌 여러 가지 색상이 분할되어 들어가 있다. 전체적으로 그의 구상 디자인들은 초기에 비해서 후기로 갈 수로 선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 작품 안에도 가로 세로로 선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작품들에 비하면 대단히 큰 변화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Broadway Boogie Woogie, 1942-1943>은 닮은꼴이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음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부기우기는 1920년대 후반에 인기 있던 블루스 음악의 장르로 1870년대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에서 발전했다고 한다. 부기우기라는 이름처럼 그림에서도 리듬이 느껴지는 듯하다.
1951년부터 1974년까지 박물관 관장이었던 Louis wjsenbeek의 리더십으로 Mondrian의 주요 작품들을 구입하였고, 1971년에는 Mondrian의 친구이자 후원가였던 Salomon B. Slijper가 소장하고 있던 Mondrian의 작품 200여 점을 기증하였다. 1998년 네덜란드 정부는 <Victory Boogie Woogie>를 미국으로부터 구입하여 미술관에 영구적으로 대여해 주었는데, 네덜란드 박물관 역사상 가장 비싼 구입이었다고 한다. Mondrian의 마지막 작품이자 하이라이트를 고국으로 가져온 거는 큰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그의 초기 풍경화부터 최종 걸작품까지 예술적 발전의 모든 단계를 한곳에서 볼 수 있으니, 헤이그에 가면 꼭 Mondrian과 그의 친구들의 작품을 만나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