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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golden age May 23. 2023

Ny Carlsberg Glyptotek Copenha

덴마크: 고갱의 코펜하겐

Ny Carlsberg Glyptotek Copenhagen (20230106)


코펜하겐의 넓고 쭉 뻗은 도로에 위치한 Glyptotek, 외관은 웅장하고 내부는 무척 이국적인 모습의 박물관이다. 덴마크와 프랑스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고대 조각품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깊이 있는 역사가 느껴지는 건축물 정문으로 들어가면 의외의 정원, 이름하여 Winter garden이 중심에 위치해 있다. 바깥의 변화무쌍한 날씨와는 상관없이 나뭇잎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시간이 멈춘 곳 같은 이 공간은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맑게 하는 오아시스 개념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천장은 유리돔으로 되어있어서 온실 같은 느낌이 들고 곧 천장에 닿을 듯 쭉쭉 뻗은 야자수들로 꾸며진 이곳. 그리고 1층 방에 가득한 고대 조각품들. 어느 시대를 포커스로 맞춰야 할지 모르게 5000년 종교와 시대를 초월한 수집품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국적인 지중해 식물들과 야자나무 옆에 위치한 북스토어와 카페도 디자인과 디스플레이가 참 멋진 곳이다. 샵에서 책과 포스터들을 보고 카페에서 티 한잔만 하고 나와도 만족스러울 만큼 유니크하다. 박물관의 후문 쪽으로 나가면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코펜하겐 중앙역이다. 숙소를 이 근처로 잡으니 교통도 편하고 맛집도 많고 위치도 맘에 들었다. 우리 숙소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Glytoteket의 돔과 넓고 깨끗한 하늘뷰도 얼마나 예쁘던지 덴마크 그림들의 하늘색이 다채로운 이유를 알 거 같았다.



Ny Carlsberg Glyptotek은 덴마크 맥주 양조업자인 Carl Jacobsen (1842-1914) 부부에 의해 1882년, Valby 발비에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발비 전시관의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현재의 박물관은 5년간의 건축과정을 거치고 1897년에 한쪽 부분이 완성되었다. Ny Carlsberg는 New Carlsberg라는 뜻으로, Carlsberg 양조업을 하는 아버지 J.C. Jacobsen으로부터 양조 예술을 이어받아 설립한 회사 이름이다.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며 덴마크에서 영웅 대접을 받은 조각가인 Bertel Thorvaldsen의 작품으로 장식된 화려한 저택에서 외동아들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동시에 예술 애호가로서의 기본 소양도 쌓게 된다. Jacobsen은 Thorvaldsen의 로마여행과 여러 유럽국가 투어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다른 나라의 예술품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가  Glyptoteket을 오픈할 때에는 이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품, 그리고 당대의 프랑스 조각품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조각품도 Jacobsen이 덴마크 조각가 Edvard Eriksen에게 의뢰하여 제작하고 기증한 작품이다. 현재까지도 Carlsberg 성공한 글로벌 양조회사로써 ”It All Comes from Beer!”라는 사명처럼 재단을 통하여  과학과 예술의 연구 및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Glyptoteket의 하이라이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품들이다. Glyptothek‘이란 이름도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세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품 컬렉션 소장을 위하여 독일 뮌헨에 만든 박물관 <Glyptothek>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Jacobsen 역시 회화보다는 모든 시대의 3D 입체적인 인간상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882년에 박물관을 처음 열었을 때 소장품이 많지는 않았지만 매우 귀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었다. 1879년에 파리에서 구매한 최초의 고대 조각인 그리스 젊은 Rayet 두상 (기원전 535년)은 지금까지도 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이다. 이런 조각상은 그리스 신전이나 무덤의 표지로 세워지던 조각품이다. 지금은 박물관의 대표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Jacobsen은 그다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첫 박물관을 오픈한 이듬해인 1883년 그는 또 하나의 대표작을 획득한다. 서기 2세기 Roman Casali Sarcophagus 석관으로 Jacobsen의 요청으로 Raphael 그림을 구하기 위하여 로마로 간 친구가 미술판매상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들은 석관을 시작으로 고대 조각상을 대거 수집하게 된다. 1887년에 9개로 시작한 그의 골동품들은 1888년에 Roman 초상화를 포함하여 268개까지 증가했다. 1899년에 부부는 그들의 방대한 골동품 수집품을 국가에 기증했고, 건축대회를 통해서 건축 디자인을 선정하며 박물관 확장 공사를 추진한다. 20년간 공들인 부부의 예술품 수집과 수년간 고민하고 논쟁 끝에 선정된 부지, 그리고 자금의 해결로 마침내 박물관은 190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오픈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바로 옆에 있는 티볼리 놀이공원이 서민들의 공간이었기에, 박물관이 그 공원 바로 옆에 지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만족스러워한 거 같다. 그들은 성공한 사업가이자 부르주아로써 대중을 한수 아래로 보았느지 대중들이 진정으로 예술을 좋아할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기에 이국적인 느낌의 겨울정원을 통해서라도 대중에게 박물관의 매력을 어필하고자 했다. Jacobsen은 겨울정원 테라스에서 개회사를 통하여 그의 신념을 명확하게 밝혔다. Glyptotek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살아있는 예술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Living art for living people!”



Jacobsen은 고대 그리스 작품을 수집하면서 그리스 인들의 영감이 된 이집트 문화를 연결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Glyptoteket의 시그니쳐인 이집트 컬렉션의 상당수는 루브르 박물관이 경매에서 자금 부족으로 매입을 결정하지 못할 때 낚아채온 작품들이다. 1800개의 규모로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통일 직전부터 고대, 중세, 신왕국 시대, 로마 시대, 그리고 이집트가 기독교 시대였던 3세기에서 7세기의 작품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Jacobsen이 수집한 첫 번째 이집트 유물은 1884년에 베이루트 주재 덴마크 영사이자 중동 미술 무역 전문가인 Julius Loytved를 통해 가져온  미라와 관이었다. 연이어서 미라와 관을 더 들여놓게 되고, 1890년에는 파리 경매에서 중요한 이집트 조각상들을 성공적으로 매입하게 된다. 이때 가져온 앉아있는 Anubis는 대표 유물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죽은 자의 신으로 알려진 아누비스로는 큰 조각상이 드문데 이 유물은 45센티나 된다. 머리는 자칼 (이집트 늑대) 모양을 하고 있고 손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앵크 (고대 십자가)를 쥐고 있는데, 이것은 룩소신전을 지키던 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집트 학자 Valdemar Schmidt의 도움으로 카이로에서 Amenemhat III (black head of a king) 등의 귀한 조각품을 손에 넣게 된 Jacobsen은 이집트 유물에 눈을 뜨게 되고 코펜하겐에 이집트 판테온을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1900년까지 집중적으로 이집트 유물들을 사들인다. 그러나 이들은 매입만으로는 판테온을 건설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직접 발굴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고, 이집트 정부와 카이로 박물관으로부터 합의를 받아낸다. 그동안 독일과 프랑스 런던의 박물관에서 만난 이집트 유물들을 보면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너무 궁금했는데, 일부 답을 얻은듯하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지속된 발굴로 글립토텍은 3미터가 넘는 화강암 조각상인 람세스 2세와 창조의 신인 Ptah-Tatenen 조각상을 가져왔다.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이 모든 게 가능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국가를 능가한 거는 아닌지 궁금해진다.



1층을 둘러보다 보면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조각품의 대단한 컬렉션에서 바로 프랑스 근대 조각품으로 넘어가는 특징을 느낄 수 있다. Jacobsen은 1878년 파리 전시회에서 프랑스 조각에 열광하게 되었고, 고대나 르네상스 어느 시대의 조각도 프랑스 조각처럼 압도적인 것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프랑스 조각에 깊게 매료된다. 그는 프랑스 조각에서 인간의 삶과 운명을 보았고, 관객들도 느낄 거라 생각했다.  1880년부터 1900년대 초기까지 매년 자신의 컬렉션을 위해 하나 이상의 프랑스 조각품을 구매하며 덴마크 조각분야에서 독점하고 있는 Bertel Thorvaldsen를 대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새로운 조각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는 외젠 들라 플랑슈의 조각품 MUSIC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로댕 작품도 여러 점 가져온다. 아니 로댕의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여기까지도 와있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보인다. 그는 로댕 작품은 전시에서 뿐만 아니라 스튜디오로 직접 찾아가서 구매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댕의 <the Kiss>에서는 고대의 조각품과는 다른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완벽하고 절절한 아름다운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인데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작품을 관람하며 이동하면서 박물관 내부 바닥과 벽, 통로, 그리고 천장의 디자인, 그리고 마감된 재료들의 재질과 색감, 특히 타일의 디자인과 색감등도 눈여겨보자. 건물 자체가 예술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덴마크 황금시대의 그림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품수가 많지는 않지만 골고루 가지고 있어서 덴마크 그림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대표작가인 Christoffer Wilhelm Eckersberg (1783-1853)가 미술계에 끼친 영향력은 덴마크 미술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는 1754년 프레데리크 5세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 당시에 덴마크 출신의 화가들은 거의 없었다. 외국의 예술가들에게 의존해 왔기에 덴마크 예술가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전문적인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으나 초기에는 교수들 대부분도 외국인이었다. 세대교체가 되면서 1818년 덴마크인 Eckersberg가 교수로 임명되었고 그는 35년간 예술, 과학, 이성, 신에 대해 강의를 하며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는 종합적인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명성과 권력, 나아가서는 시장성까지 가진 모두가 원하는 곳이 되었다. 이 당시 화가들은 거의 모두 다 Eckersberg의 제자였고, 그들의 예술적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페인팅의 숙련도였다. 이 시대 덴마크 작가들을 보면 크게 특징을 가진 작가가 없다.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아마도 같은 교육기관에서 획일적인 교육을 받으며 기술을 연마해서 그런 게 아닐까. Jacobsen 부부가 1882년에 Valby에서 미술관을 처음 오픈하면서 그는 지속적으로 덴마크와 프랑스 당대의 미술품을 구매하며 대중을 위한 컬렉션을 늘려나갔다. 그가 구매할 수 있었던 덴마크 그림들은 아마도 거의 대부분 Eckersberg의 제자들의 그림이었을 거다. 그 당시에 대단히 두각을 나타낸 작가가 없었고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전문 장르만 다르게 다뤘기 때문에, 구매자 입장에서도 특정 작가의 그림에 투자하며 수집하지 않고 장르별로 골고루 구매했을 거 같다. 그래서 Glyptotek에서는 2층의 덴마크 그림을 보면 작가는 굉장히 많은데 특정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으로 많다거나 인상 깊지는 않은 거 같다. 그저 잔잔하고 차분한 덴마크 느낌이다. 황금기는 전반적으로 다 같이 발전하는 시기인 거 같고 19세기로 들어가면서 작가 개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거 같다.



프랑스 인상주의 컬렉션이 알차게 촘촘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인상주의의 교과서 그 자체였다. 덴마크에 와서도 이렇게 인상주의를 많이 만나다니… 전 세계에서 열광하는 이유가 있는 거 같다. 인상주의 대표 작가들의 귀한 작품이 모아져 있는 이곳에서 컬렉션을 보다 보니 이상하리 만큼 고갱의 작품이 많았다. 특히 인상주의 컬렉션의 마지막 방에는 Paul Gauguin의 작품으로 가득했다. 작품들은 그동안 주로 보아왔던 이국적이고 선명한 색상이 쓰인 화풍이 아니었고, 차분하고 고요한 겨울 풍경이었다. 겨울 풍경의 작품이 많은 이유를 알고 보니 고갱의 조강지처가 덴마크사람이었고 그들이 함께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서 산적이 있었다는 거다. 그동안 고갱의 작품들은 주로 프랑스와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들을 많이 봐서 덴마크랑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뜻밖의 만남이 되었다.



고갱의 복잡한 집안 사연으로 어린 시절을 페루의 외가에서 부유하게  보낸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서 1871년 그의 나이 23세에 증권거래소에 취업해서 고소득자로 부유한 생활을 시작한다.  성공한 젊은 나이인 1873년 결혼할 무렵부터 그는 취미로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고 카미유 피사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성공적인 젊은 시절을 보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때에도 고갱은 항상 여행을 탐닉하고 파리에서 답답함을 느낀 거 같다. 고갱은 덴마크 여성과 결혼하였고 부부는 10년 동안 다섯 자녀를 낳는다. 그가 1881년과 1882년에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걸로 보아 취미로 시작한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꽤 많이 쌓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주식 시장의 폭락으로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그는 직장을 잃게 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미술시장의 상황도 안 좋아지면서 판매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갑자기 가난해진 화가와 살게 된 아내는 생활고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인 덴마크로 떠나게 되고 결국에는 고갱도  다음 해인 1884년 11월에 가족을 따라 코펜하겐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때 고갱은 자신이 그린 초기 작품들과 부유한 시절에 피사로 등의 주변 인상주의 작가들로부터 구입한 그림들을 코펜하겐으로 가져가고, 그중 몇몇은 현재 Glyptothek의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그가 처음 코펜하겐에 도착했던 겨울에 피사로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곳은 아름답고 즐겁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라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낙관적으로 소식을 전했다.


1884년에 그린 ‘코펜하겐의 눈‘ 작품은 아주 평범하다. 흔한 겨울풍경이다.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썰매 타는 아이들과 눈이 녹아서 오래된 낙엽이 드러난 숲 속의 겨울나무 모습은 꾸밈이 없다. 아마도 이 그림이 코펜하겐에서 처음으로 그린 그림일 거다. 고갱은 마음에 평화로움을 느끼며 겨울 모습을 여러 점 그린다. 이때 그린 겨울 풍경에서 나타나는 고갱의 잔잔한 마음이 지금까지도 따뜻하게 전해진다. 그림만 보고 있으면 전혀 고갱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고갱의 후기 그림에 익숙한 관람객으로써 너무나 평범한 이 그림들이 고갱의 작품이라는 게 낯설다. 고요한 호수와 작은집 두어 채, 가늘고 기다란 겨울나무 몇 그루, 그리고 겨울의 회색빛 하늘. 이 시기에 고갱의 주요 관심사는 하늘이었다. 고갱은 전문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눈이 반사되는 겨울 하늘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핑크빛이 도는 겨울, 푸른빛의 겨울, 회색빛이 나는 어두운 겨울, 이 방의 겨울 그림들은 평범한 풍경이지만 따뜻하니 너무 좋다. 부채 위에 과슈로 그린 풍경화도 인상적이다.



고갱은 아내의 도움으로 그림 판매도 하고 직업 소개도 받았지만, 덴마크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무능한 경제력으로 부부간의 불화가 시작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 고갱은 덴마크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되고 일도 하지 않았고 그림도 팔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샤를로텐보르 궁전의 전시 심사위원단에게 거절당했고, 예술적인 교감을 나눌 친구도 없이 답답함을 느끼며 불만이 쌓여간다.  부부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1885년 초여름에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혼자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이후 1891년까지 부인과 편지만 주고받으며 따로 지냈고 결국 1894년에 정식으로 이혼을 한다. 부부의 서신을 보면 고갱의 아내는 남편의 작품을 보관하고 판매하고 전시하는 등 생활력이 강한 능력 있는 어머니이자 아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의 고갱의 행적은 많이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타히티에 정착하여 이국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는 늘 여자를 좋아했으나 책임감은 없었던 거 같고-타히티에 고갱의 손녀라고 주장하는 여인도 있다-경제적 개념이 없어서 그림을 팔아도 돈을 모으지 못했다. 결정적인 이혼 사유도 돈 문제로 인한 불화였다고 한다. 미술관들을 다녀보면 고갱 그림은 개성도 강하고 숫자적으로도 우세하다. 생전에 많은 그림을 그려서 판매를 했음에도 죽을 때까지 가난에 시달렸다. 성공 가도를 달릴 때 결혼했고 든든한 가장으로서의 행복함을 빼앗아간 파리 증권시장의 폭락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이 변환점으로 지금의 고갱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남아있게 된 거였다.



이혼 직전인 1893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전시회에 고갱의 작품이 51개나 출품된다. 고갱이 코펜하겐에 남겨두고 떠난 그의 그림들은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의 아내가 알뜰하게 내다 판매하였고 누구에게 판매가 되었는지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 그림들은 Jacobsen의 아들이자 박물관장이었던 Helge Jacobsen이 고갱의 작품 수집에 열정적이었던 덕분에 Glyptothek에 훌륭한 컬렉션으로 남게 된다. 보기 힘든 고갱의 초기 컬렉션이다. 겨울에 방문한 코펜하겐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품부터 이집트 유물들, 그리고 고갱의 초기작품까지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칼스버그 맥주를 보면 야자수 정원을 가진 미술관이 떠오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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