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Louise Louise Louise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20230107)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간 주목적은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는 Louisiana Museum 뿐만 아니라 기대 이상으로 좋은 미술관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 뜻밖의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코펜하겐에서 해안가를 따라서 북쪽으로 35km 올라가면 작은 마을 Humlebæk에 Louisiana Museum이 있다. 미술관은 바다를 끼고 있고 그 바다 건너편은 스웨덴이다. Louisiana Museum은 덴마크를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잠깐 들릴만한 곳에 위치하지 않아서, 오로지 이 미술관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꼭 계절이 좋을 때 방문하길 권하고 싶다. 미술관 건물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야외 정원과 그곳에서 이어지는 바닷가까지 전체를 느끼고 즐겨야 하기 때문에 날씨가 꽤 중요한 곳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으니 평일에 방문하면 좋을 거 같다. 그나마 계절이 좋을 때는 관람객이 야외까지도 분산이 되지만 겨울에 비라도 내리면 내부가 복잡 복잡하다. 기차역에 내려서 한 10여분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쭈욱 걷다 보면 금방 미술관이 나온다. 동네가 아기자기하니 너무 예쁘다. 외지인이 많이 지나다녀서 싫을 법도 할 텐데 예쁘게 정성 들여 장식한 뜰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도 즐겁게 해 준다. 미술관 입구에 역대 전시 포스터의 디자인이 눈에 띄게 세련되었다.
미술관이 <Louisiana>라고 불리게 된 연유가 놀랍다. 이 자리에 처음 저택을 소유했던 Alexader Brun이라는 사람의 세명의 부인 이름이 모두 Louise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저택은 Louisiana villa 정도로 불리었나 보다. 이후 1958년 당시 이 땅의 소유주였던 Knud W. Jensen가 미술관을 지으면서 그 빌라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서 쓰게 되었다. 세상에나, 부인 세명의 이름이 똑같은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아주 흔한 이름이었어도 이상하다. 아니면 그 당시에 여성에게 이름이 없어서 결혼한 남자가 이름을 지어준 건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재미난 스토리이다.
1958년 미술관 설립 시에는 덴마크 현대 미술관으로 만들 생각이어서 Knud W. Jensen은 몇 년 동안 덴마크 근대 미술품들을 수집했다. 그러나 그는 카셀에서 열린 대형 전시회에서 글로벌한 미술시장의 규모에 충격을 받게 되었고, 덴마크 미술을 국제적으로 홍보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즉시 미술관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덴마크 작가인 Asger Jorn 등을 집중적으로 사들이면서 유럽 및 미국의 대형 작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Louisiana Museum은 현대 미술을 전체 연대순으로 나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컬렉션을 예술적 시기로 묶었다. 크게 나누면 1945년 이후의 유럽미술과 미국미술, 그리고 1990년 이후의 미술로 나눠서 보여주고 있다. 현대작가인 Louise Bourgeois, Philip Guston, David Hockney 등의 작품도 보유하고 있다. 특히 2007년에는 David Hockney의 <A Closer Grand Canyon, 1998>을 구입하였다. 이 작품은 하나하나 칠한 60개의 작은 캔버스를 파노라마로 연결하여 구성한 작품으로 205.5*744cm 크기의 대형 사이즈이고 강렬하고 단순한 색상으로 표현되어 그랜드캐년의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일본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Gleaming Lights of the Souls' 방도 있다.
전시실로 들어가며 처음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들은 덴마크 작가인 Asger Jorn (1914-1973)의 추상화들이다. 미술관을 오픈할 때 공을 들여 수집한 자국의 대표 화가이다. 색감이나 느낌이 화려하면서도 정리된 듯, 미국의 추상화와는 어딘지 다른 느낌으로 집에 걸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미술관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가는 Alberto Giacometti이다. 이곳만큼 다양하게 많은 작품을 보유한 곳이 있을까 싶다. 앙상한 사람 형상들을 여러 개 모아서 그룹으로 배치하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게 한 공간도 참 인상적이었다. 통창이 있는 공간에서 혼자 걷고 있는 <Homme qui marche, 1960>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바깥의 자연풍경과 잘 어울린다. <걷고 있는 남자>의 맞은편 흰 벽에는 영국작가 Francis Bacon (1909-1992)의 <Man and Child, 1963> 작품이 걸려있다. 1960년대 초, 베이컨은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한 카페에서 Giacometti를 만난 적이 있다. Bacon은 평소 Giacometti의 작품을 좋아했고, 부와 명예를 다 가진 그가 초기에 정착한 소박하다 못해서 허름한 작업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점도 존경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식당에서 팁을 과하게 많이 주는 Giacometti의 모습에서 동질감도 느꼈다. 그 둘은 1964년, Giacometti가 전시 준비를 위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들의 우정을 기념하며 작품을 마주 보게 배치했을까, 왠지 훈훈하다.
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스위스에서 유명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Giovanni Giacometti는 1933년에 임종할 때에 스위스 국가차원에서 애도를 하고 크나큰 문화적 손실이라 평가하며 업적을 치하하였다. 아버지는 Alberto가 어릴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네바의 미술학교에서 교육시킨다. 그는 성공한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어머니는 정신적인 후원자가 되었으며, 헌신적인 동생 Diego는 그의 작품의 모델이자 조수로 평생 형 옆에서 수족이 되어서 작업을 도왔다. 축복받은 그는 가족들의 서포트로 온전히 작업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있는 스위스를 자주 방문하며 짧게 다녀오기도 하고 길게 머무르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의 낡은 스튜디오에서 동생과 지내며 작업을 했다. Giacometti는 당대의 거의 모든 중요한 예술가와 작가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천재들끼리 서로 알아보고 당기는 힘이 있었나 싶다. 파리는 도대체 어떤 곳이었길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이 한 카페에 모이고 밤에는 바에 모여서 토론을 하며 서로 교감을 나누었을까. 지금도 최고로 사랑받는 도시인 파리이지만, 과거의 파리는 정신적으로 지금보다 더 화려했던 거 같다.
Giacometti가 20대였던 파리에는 입체파가 유행하고 있었고, 그 역시 시류에 영향을 받아 입체파 스타일로 작업을 시작했다. 1929년 초여름에는 Joan Miró, Max Ernst 등 초현실주의자 친구들을 새로 사귀게 되면서 Giacometti도 1933년도까지 한 4년 정도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32년에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회 첫날 제일 먼저 방문한 사람은 Pablo Picasso였다. Picasso는 Giacometti보다 20살이나 많았지만 그 둘은 절친한 친구로 지내며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었고, 특히 Picasso가 <게르니카>를 그리던 시기에 Giacometti는 그의 화실에 들려서 작품의 진행 상황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또한 Balthus와도 30년간 우정을 나눴는데 이 둘의 예술적 성향은 완전히 달랐지만 Giacometti는 다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성품이었기에 항상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던 거 같다. 아래 왼쪽의 사진은 1932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걷는 여자>를 표현한 초현실 시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후반기인 1960년에 제작된 <서있는 여인>으로 얇고 길어진 스타일이다. 이곳에서 보유한 작품의 폭이 넓어서 그의 작품 변천사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통로를 따라서 들어가다 보면 Giacometti의 작품이 정말 많이 모아져 있는데. 특히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작은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품이 작다고 해서 그가 만들면서 실패하거나 소홀히 대한 작품들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그가 30대 중반에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고 나서 10여 년 동안 고군분투 하며 고민에 고민을 담아 만든 인간의 형상들이다. 비례가 길어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작은 작품들만 나왔는데 이곳에 이렇게 많이 모아져 있었다. 이 소품들은 7cm 보다 작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1939년에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1940년에는 프랑스 북부가 독일군에 점령당하자 파리 시민들도 도망가기 시작했다. Giacometti는 작업실 한쪽 구석에 커다란 구멍을 파고, 지난 몇 년간 만드는 과정에서 파괴당하지 않고 살려둔 작품들을 바닥에 묻고 흙으로 덮었다. 내가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 소품들은 나름의 매장의식을 치른 결과 세계 2차 대전에서 살아남은 귀한 작품들이었다.
Giacometti가 일부러 작품을 작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두상이나 인물을 잘 만들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이즈는 작았지만 그 안에 인물의 모습을 다 담을 수 있었다. 그는 1939년에 취리히의 국가적인 규모의 전시회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의 볼품없이 작은 작품들은 전시 관련자들을 실망시켰다. 그때까지도 스위스는 Giacometti의 비전을 알지 못했지만, 파리에서는 그가 추구하는 것을 이해해 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Picasso는 Giacometti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조각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이 작은 형상들이 조각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를 통찰하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Giacometti에게 큰 도움이 된 사람은 피에르 마티스라는 화상이었다. 앙리 마티스의 막내 아들인 피에르는 뉴욕에서 영향력 있는 화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사람의 안목은 정말 대단했던 거 같다. 그는 Giacometti의 친구들인 미로와 탕기, 발튀스 등의 미국 에이전트 역할을 했는데, Giacometti에게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1936년에 처음으로 그의 <걸어가는 여자> 작품을 한점 구매하고 그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1946년 어느 날 Giacometti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뭔가 구매할 작품이 없는지 둘러보았으나 그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기에 작품 좀 크게 만들라고 냉정하게 쓴소리를 하고 나온다. 이 충고는 Giacometti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작품 사이즈는 커지지 않았다. 문제는 작품의 키를 키울수록 인체는 점점 더 가늘어지고 작품의 발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거였다. 이런 노력으로 Giacometti의 작품은 변해갔고 그의 스타일이 확립되어 갔다. 그는 급격하게 인물의 비례가 변한 것에 스스로도 당황했으나 곧 그 비례감에 친밀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가늘어질수록 한눈에 형상 전체를 바라볼 수가 있었고, 길고 날씬하게 표현되는 재료의 역동성에서는 생명력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런 형태의 작업에 희열을 느끼며 1947년에는 놀랄 만큼 작업의 속도가 붙었고 만족스러운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된다.
유럽의 화상들은 그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피에르 마티스는 그의 창조력과 결과물에 감탄하며 미국에서의 개인전을 제안하였고, 1948년에 뉴욕의 피에르마티스 갤러리에서 Giacometti의 첫 개인전이 열린다. 피에르는 그의 작품 중 하나인 <Picasso의 반신상>도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Giacometti는 미국에서도 유명했던 Picasso의 덕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세우며 그 작품을 폐기해 버린다. 우연이지만 Giacometti의 전시 기간 중에 피카소의 최근 회화 작품들도 뉴욕에서 전시가 되었고 미술계의 온 시선은 그곳으로 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iacometti의 개인전은 미술계에서 회자되었고 작품도 많이 팔리며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 결과로 프랑스에서도 그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50년에는 바젤에서 전시회가 열렸지만 한국전쟁등 불안한 세계 정세의 영향 때문인지 작품은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 고국인 스위스는 이때까지도 Giacometti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곧이어 뉴욕의 피에르마티스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 열리고 그는 또다시 미국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된다. Giacometti는 유럽보다 미국에서 먼저 인정받은 것인데, 이 당시에 예술의 중심지는 이미 유럽에서 뉴욕으로 옮겨갔기 때문인 거 같다.
프랑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작가 생전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고, 파리 현대 미술관조차도 그의 작품을 딱 2점만 구매하였다. 1955년에는 뉴욕의 구겐하임과 런던, 독일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만큼 그의 작품 숫자가 많았어서 가능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다음 해에는 스위스 베른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갖게 되었고 생존하는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나는 그동안 얇고 길쭉한 조각품들을 주로 만나보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인생 후반 20년 동안에 폭풍처럼 몰아친 작업으로 탄생된 작품들이었다. 그가 평생 동안에 조각 작업만 한 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드로잉과 초상화들도 많이 그려냈다. 늘 모델을 몇 시간씩이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대상을 보면서 그렸다. 특히 많은 작품들은 동생 Diego를 모델로 작업하였다.
제임스로드가 쓴 자코메티의 전기는 마치 한 권의 소설 같다.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소설에나 나올법하게 정신세계가 평범하지 않다. Giacometti 작품 속의 모델이 되어준 주변인들은 그의 부인인 아네트와 여자친구인 카롤린, 동생 디에고, 어머니, 그리고 친구가 된 일본인 교수등 매우 한정적이었다. 부인과 여자친구를 동시에 거느린 덕에 아네트와 카롤린의 지겨운 갈등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지속된다. 그가 대하는 부인과 여자친구의 개념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작가 본인도 생전에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네트와 디에고의 말도 안 되는 순종적인 헌신이 있었기에 위대한 작가 Giacometti가 있었을 거다.
1965년에는 중요한 회고전이 3군데에서 열리게 된다. London (Tate Gallery),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Denmark (Louisiana Museum). 뉴욕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이 있었지만, 그는 이때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조각과 회화 드로잉이 140여 점이 전시되었고, 전시회의 리셉션에는 로스코, 데쿠닝, 라우센버그 등 미국의 유명 미술가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참석했다. 그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배를 이용했다. 그는 이 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코펜하겐으로 먼 여행을 떠난다. 새로 멋있게 지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인데 그곳이 바로 여기 Louisiana Museum이다. Louisiana는 아마도 이 전시회 때 Giacometti의 작품을 대거 구매한 듯하다. Louisiana Museum에서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그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고 꽤 젊은 나이인 1966년에 세상을 떠난다. Giacometti는 밤샘 작업은 기본이고, 하루에 담배를 몇 갑씩 피우고, 커피를 많이 마셨으며, 식사는 제대로 하지 않았고, 쓰러질 정도로 체력이 방전될 때까지 작업을 하고 또 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늘 기침을 하며 죽을힘을 다해서 하루하루 작업하며 숨을 이어갔다. 후회 없이 작업을 하며 더 이상 쓸 힘이 없을 때까지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마지막으로 다시 일어날 힘이 없어지니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떠난 거 같다. 그가 죽는 순간에 그의 옆을 지킨 가족들과 그를 세상에 알린 화상 친구들과 오랜 친구들, 그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살면서 외롭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유명해진 후에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는 세상적인 부와 편한 생활을 누릴 줄 몰랐으며, 작업에 몰두하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주변 사람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나누며 열정적으로 살다 간 예술가였다.
야외 조각 중에 1976년생인 폴란드출신 작가 Alicja Kwade가 돌로 만든 구 <Pars Pro Toto, 2018>는 우주와 행성을 표현하는 듯 신비스럽다. 특히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Alexander Calder의 작품들과 Henry Moore 작품도 인기작품이다. 야외 조각공원에는 45개의 작품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풍광 속에 살며시 놓여있고 자연의 일부분처럼 변화무쌍한 날씨와 계절에도 개의치 않고 잘 어울린다. 날씨가 좋은 계절에 와서 야외의 잔디에 누워서 하늘과 바다와 조각품을 함께 감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