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숲 속의 요괴 에밀 놀데
SMK – Statens Museum for Kunst (20230108)
덴마크 국립미술관
내게는 코펜하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그 유명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동상이 세계에서 어이없는 3대 관광지중 하나로 꼽힌다는 점 외에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먼 나라였다. 그러던 중 리사가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미술관이 이곳에 있다고 엄마랑 꼭 함께 가고 싶다고 하여 방문하게 된 도시이다. 또한 코펜하겐의 미술관에서 일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도시라기에 어떤 도시일까 기대감을 가지고 방문하게 되었다. 결론은 코펜하겐은 이렇게 며칠 가볍게 다녀갈 도시가 아니라는 거다. 자세히 보고 싶은 미술관도 많고, 역사적인 명소와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이기에 여름에 한 달 살기라도 해보고 싶은 도시로 마음에 남게 되었다. 음식도 굉장히 좋다. 특히 빵은 어딜 가나 너무 맛있었다. 데니쉬‘ 빵이 유명하듯이 코펜하겐의 빵은 정말 특별했다.
넓고 쭉 뻗은 도로 때문에 도시의 풍경은 다른 유럽 도시랑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양옆의 건물들은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축물인데 비해서 도로가 굉장히 넓었다- 어떤 도로는 족히 8차선은 돼 보일 정도였다. 양옆의 건물 자태로 보아서 최근에 만들어진 도로 같지는 않았다. 그 옛날에 도시계획을 했단 말인가? 코펜하겐은 1728년부터 80년 동안 대화재를 3번이나 겪게 된다. 1728년 10월 20일부터 3일간 있었던 대화재로 중세 시대에 건설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0년 동안 재건을 하였는데 1795년에 또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유산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18세기 이전의 집도 몇 채만 남게 되었다. 1807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군이 코펜하겐을 폭격하면서 도시는 또다시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 현재의 도시 재건계획이 세워지게 된다. 엄격한 건축법으로 벽돌은 필수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고 건물도 통일감 있고 예쁘게 지어져서 도시 전체의 미학에 영향을 준다. 교차로의 집 모서리는 직각이 아니고 대각선으로 만들어지게 되면서 도시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광장의 모양이 사각형이 아닌 팔각형임을 볼 수 있다. 특히 넓고 곧게 잘 기획된 도로로 유럽에서 가장 긴 보행자 거리 중 하나인 Strøget 이 만들어진다. 또한 그 당시에도 자전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기에 자전거 인구를 고려해서 길을 넓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옆길을 10미터 너비가 되게 확보하였고 주도로는 12-15미터 너비로 만들게 되었다. 대화재로 잃은 문화유산은 어마어마 하지만, 아픔 속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현대적인 코펜하겐 분위기를 만들고 수백 년이 지나도 불편함 없는 미래지향적인 도심을 건축한 그들의 감각과 안목은 대단한 거 같다.
코펜하겐의 주립미술관은 덴마크의 대표 미술관이다. 덴마크 군주들이 처음으로 예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 수세기에 걸쳐 왕실의 그림, 조각, 판화등 상당한 규모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특히 Christian IV 크리스티안 4세 (1577–1648)와 Frederick V of Denmark 프레데릭 5세 (1723–66)는 다른 유럽 왕실의 컬렉션에 뒤지지 않도록 폴랑드르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작품을 대규모로 구입하며 왕실 컬렉션의 규모를 늘려갔다. 화재로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다 소실되어서 더 열심히 모으지 않았을까 싶다. 덴마크 왕실은 민주주의가 들어오면서 1827년에 일반인들에게 컬렉션을 공개했고, 사람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을 방문한다. 그러나 궁전은 1884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 1897년 완전히 새로운 덴마크 국립 미술관이 탄생하게 된다. 컬렉션은 14세기부터 현재까지 덴마크와 해외에서 온 260,000개 이상의 그림, 조각, 판화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루카스 크라나, 안드레아 만테냐, 티지 안 베첼리오, 렘브란트와 같은 1300년에서 1800년 사이의 서유럽 거장들의 작품들도 보유하고 있다. 그 이후부터는 꾸준히 덴마크 작품 수집을 해왔고 특히 최근에는 현대미술품 수집에 집중하고 있다. 미술관은 넓지만 4 섹션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1800년도 이전의 유럽미술, 덴마크 황금기시대의 회화, 1900년도의 프랑스 미술, 그리고 1900년도 이후의 덴마크와 유럽의 현대미술로 나뉜다. 700년 이상 걸쳐있는 이 컬렉션들을 통해서 덴마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고 싶었다.
덴마크 현대 그림부터 보고 싶어서 연결된 건너편 건물로 갔다. 원건물을 훼손하지 않고 연결하여 유리천장을 사용하여 증축한 현대적인 건축 감각이 멋지다. 우선 덴마크와 주변국가 작가들의 1900 이후 그림부터 찾아갔다. 첫 번째 들어간 방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그림이 가득했다. 단번에 Edvard Munch 에드바르트 뭉크 (1863-1944, 노르웨이)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으나 찬찬히 보니 전부다 뭉크 그림은 아니다. 무척 흡사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Jens Søndergaard 옌스 쇠네르고르 (1895-1957) 덴마크 작가의 그림이다. 뭉크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한 살 많은 누나를 병으로 잃으며 죽음의 공포와 우울감과 두려움으로 평생을 시달리고 연이은 사랑도 실패하며 정신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세 번째 사랑에서는 여인과의 다툼으로 왼손가락에 총상을 입고 사랑마저도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는 세상과의 소통에도 실패하고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의 세계를 표현하며, 슬프게도 결과적으로는 오래 살게 된다. 쇠네르고르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심리적으로 죽음의 영향을 받았을 가족관계나 주변인물에 대한 스토리는 찾지 못했지만, 이 두 작가는 정서적으로 많이 닮은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 거 같다. 뭉크의 첫 번째 그림 <Death Struggle>은 임종을 둘러싼 가족들의 슬픔과 영혼의 안녕을 기도하는 성직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다음 그림으로 발을 옮기면 비슷한 어두운 느낌의 그림으로 Jens Søndergaard 옌스 쇠네르고르의 작품이다. 해가 지는 마을을 뒤로하고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서 매장하는 모습을 그린 <Funeral>이다.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한 유령처럼 묘사했다. 전쟁과 스페인독감 등의 질병으로 갑작스러운 이별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작가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보며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21세기의 우리도 이 시대의 전쟁과 질병을 겪으며 같은 모습을 지켜본다. 이 방에 걸려 있는 작품은 나무 한그루 <Winter at Nordstrand 뭉크> 조차도 슬픔을 가득 담고 있다. 아래층의 덴마크 황금기 회화 섹션에서 만난 또 다른 장례식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Anna Ancher의 <A Funeral> (1891)과 또 다른 <A Funeral> (1883), Frants Henningsen의 작품이다. 우연이겠지만 유독 죽음과 장례식을 표현한 그림이 많이 보이고 기억에 남는다.
다음 방에는 Emil Nolde 에밀 놀데 (1867-1956)의 작품이 여러 점 걸려있다. 작품의 색상과 표현이 참 풍부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작품수도 많고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작가의 국적은 독일로 되어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간혹 German Danish로 표기하기도 했다. 왜 독일 작가가 덴마크 작가들 사이에서 큰 비중을 차지고 있을까. 덴마크는 왜 그의 국적에 살짝 발을 올려놓는 걸까. 지도를 찾아보니 그의 국적을 독일이라고 하기에는 덴마크 쪽이 좀 억울할 거 같기도 하다. 그는 독일-덴마크 국경지대인 Tondern 퇴뇌른 근처의 Nold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퇴뇌른은 1920년까지는 독일이었고 현재는 덴마크이다. 그러나 그 도시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Nolde는 애매하게 국경 라인에 걸쳐 있어서 독일도 되었다가 덴마크도 되었다가 현재는 독일에 속해있다. 이 지역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음에도 에밀놀데는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은 마을을 지도까지 찾아보며 들여다본 이유는 그 마을이 작가에게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원래 본인의 이름 Hans Emil Hansen을 버리고 Nolde로 성을 바꾸었을 정도로 고향을 사랑했고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다 눈을 감았다. 재단이 만들어졌고 그가 지어서 살던 집은 Nolde Museum (1957 개관) 이 되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후 본인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는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만큼 그는 독일과 덴마크에서 중요한 작가로 기억되나 보다.
그는 표현주의자로 불려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 그의 작품을 보면서 ’ 표현주의’ 작가라고 구분 짓고 싶지 않지만, 그의 작품들은 표현주의 특징을 넘치게 가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그는 스스로 표현주의를 개척한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대상을 깊게 관찰하며 정성껏 풍부하게 묘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꽃도 한송이 한송이 소담스러우며 다채롭고 강렬한 색상으로 표현되었고, 화병에는 밝은 광채로 생명감을 불어넣는다. 넘실대는 파도의 물보라 거품도 깊은 바닷색과 대비되는 밝은 색으로 생동감이 넘치며, 해가 기울며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품은 구름이 뭉개 뭉개 흘러간다. 인물의 표현도 풍요롭다. 게르만족의 굴곡 있고 각진 얼굴에 단순하고 거친 붓질로 표정을 살렸고, 때로는 동화 속의 요괴 혹은 요정처럼 현실과 동떨어지게 그리기도 한다. 이런 특색 있는 화풍을 종합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이전에 없던 표현주의가 되는 거 같다
또한 표현주의 작가들이 남태평양과 아프리카에서 강한 영감을 받고 가면과 원시인물의 조각상 토착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조각하고 수집하는 경우가 많은데, 놀데의 작품에서도 그런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는 1913년부터 모스크바, 시베리아를 거쳐 한국, 일본, 중국을 거쳐 독일령 뉴기니까지 긴 여행을 다녀온다. 그 시대에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한국까지 오다니, 우리나라에는 그가 다녀간 기록이 없지만 그의 자서전과 그림에서는 한국을 다녀간 흔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그린 인물 드로잉 몇 점이 있고 우리나라에 대해서 신비하고 아름답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국적인 모티브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은 것은 한국 방문 이전에 그린 <The missionary> 그림의 장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마도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장승‘을 보고 영감을 받았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뉴기니에서 그린 인물화와 풍경화등은 그들의 문화를 진정성 있게 녹여내고 있는 게 느껴진다. 폴 고갱을 표현주의 초기 작가로 보는데, 놀데의 뉴기니에서의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에서 8년을 머무르며 쏟아낸 향토적인 그림들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고갱이 그린 십자가의 예수님과 놀데가 그린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이 많이 닮은 듯하다.
그는 젊어서는 여러 도시에서 공부를 했고 취업도 했으며 여행도 참 많이 다녔다. 젊은 날에는 베를린, 스위스, 뮌헨, 파리등을 무대로 활동했으며, 60이 되어서야 한 곳에 정착을 한다. 그는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고향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꽃을 그린다. 이때 그린 양귀비와 해바라기를 보면 좀 현대적이다-요즘 작가들의 꽃 모습이 보인다. 그는 반고흐의 꽃그림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그러고 보니 해바라기의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는 신실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라며 어려서 성경 전체를 읽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에 종교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지만, 성경에서 중요한 장면들을 매우 강렬하게 그렸다. <최후의 만찬>이나 <예수의 생애 9편>이 그렇다. 그는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도 하며 초반에는 나치당을 지지했으나,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의 작품은 퇴폐미술(Degenerate art/Entartete Kunst)로 낙인찍혀서 총 1,052점의 그의 작품이 박물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1941년 이후에는 그림자체를 그릴 수 없게 되었으나 몰래 수백 점의 수채화를 그렸다고 한다. 나치 집권기인 1933 ~ 1945 사이에 히틀러는 모더니즘 미술을 공개적으로 탄압했다. 그는 모더니즘 미술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예술로 분류하고 퇴폐미술전을 열어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며 탄압했다. 히틀러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창의력은 제한적인 신고전주의를 좋아했다고 한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되는 게 마땅하다는 논리를 세뇌시키기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그리고 남성성이 돋보이고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강조하는 그림을 도구로 사용한 거 같다. 그의 그림은 나치가 원하는 화풍이 아니었다. 표현적이고 현대적이며 종교화도 있었으니 탄압의 대상이 되었을 거다. 훗날 나치로 부터 되찾아온 8점을 덴마크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예수의 생애 9편>은 Nolde Museum에 있다는데 꼭 한 번 가서 그의 정원과 그림들을 보고 싶다. 지베르니처럼. 오래전에 Emil Nolde를 연구하신 분의 책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조명을 못 받은 작가인데 언제 한번 꼭 소개가 되길 희망해 본다. 이 저자분께서 디테일하게 작가의 생애를 연구해 두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분의 책에서 지도와 드로잉 사진을 가져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덴마크 황금기의 작품들은 (1800-1850) 네덜란드 황금기와는 시기도 다르고 작품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덴마크의 풍경화는 그림처럼 아릅답다. 하늘은 환하고 밝게 매우 이상적으로 그려졌다. 덴마크는 겨울이 길고 어둡고 날씨 변화가 심한 곳인데 그 현실과는 반대이다. 바다풍경 또한 상상 속의 바다인 거 같다. 강력한 해군을 가졌고 전투가 끊임없던 덴마크의 현실과는 다르게 평화롭고 잔잔하기만 하다. 19세기 초반에 시골을 떠나서 현대적인 도시에서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이 시골 풍경을 좋아했나 보다. 초상화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분위기이다. 전신 초상화는 두상이 좀 큰 거 같고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좀 과장되어서 동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 느낌이 든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풍속화처럼 그 시대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맛은 없고 대신 깔끔하고 이상적인 공간을 꾸며서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에 외국에서 공부하며 살다가 온 화가가 많아서 그런지 그리스 신전이나 이태리 건축물을 그린 그림도 많이 보인다. 덴마크 국기가 등장하는 민족주의적 그림들도 보인다. 실상은 암담한 국가적 현실 속에서 내적 갈등을 감추지 못하고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잘 포장된 느낌이다.
후기 황금기에서 20세기로 들어가면서 그림은 다시 인상파 그림처럼 색상이 화려하고 빛이 들어오며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거 같다. 과장되거나 억압하고 눌리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난 듯하다. 화풍이 획일적이지 않고 굉장히 다양하게 발전해 간다. 이후 현대미술로 넘어가면서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21세기 트렌드를 주도하는 북유럽 디자인이 나오게 되나 보다. 유럽에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덴마크는 왕정이 무너지며 시민국가를 거쳐서 현대 민주주의로 상황은 계속 변해가지만 그림은 현실만큼 격변하지 않는다. 가장 화려했던 시기에 모든 것이 한 줌의 잿더미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해서 그런 걸까. 종교화나 신화를 그린 그림도 별로 없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무덤덤해 보인다. 과장되게 예쁘게 표현하지도 않고 감정 표현도 강하게 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 그린 그림을 황금기 작품이라고 칭하는 이상한 분위기이다. 유럽의 어느 나라 그림 하고도 다른 독특한 덴마크만의 분위기가 있다. 이 미술관에서는 시대 순서대로 보면서 코펜하겐에서의 미술 흐름을 느껴보면 좋을 거 같다.
깜짝 선물의 방이 있다. 1900년도의 프랑스 인상파 작품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꽤 많은 작품을 골고루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프랑스 작가의 작품들로 골고루 구성되어 있고 책에서 보던 익숙한 그림들의 실물을 영접할 수 있다. 어떻게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 인상파 작품들을 보유하게 되었을까. 정치가이자 예술품 수집가인 요하네스 럼프(Johannes Rump)는 1928년에 자신의 초기 프랑스 모더니즘 회화 컬렉션을 이 박물관에 대규모로 기증했다. 그는 코펜하겐의 시민대표 사회 민주주의자로써 평범한 사람들이 예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조르주 브라크, 앙드레 드랭, 앙리 마티스, 피카소 등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경우처럼 과거 한 인물의 평범하지 않던 앞선 생각이 후손에게는 큰 문화유산으로 남겨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일본에도 그 시절에 서양미술에 눈을 뜨고 어렵게 작품을 수집한 기업가들의 덕분에 지금 그들이 보유한 미술품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다. 마티즈 그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아주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뭔지도 모르면서 유아 때부터 현장에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참 부러웠다. 마침 마티즈전시가 열리고 있어서 관람했는데 너무나 재밌는 기획이었다. 마티즈 그림의 재발견이고 오래 기억에 남을 전시였다. 이 전시에 대해서는 따로 챕터를 만들어야겠다. 국립미술관 위상에 걸맞게 시대별로 작가별로 너무나 좋은 작품들을 알차게 보여준다. 그리고 공간마다 시대적 배경설명과 작가와 작품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친절하게 꽉 찬 내용을 제공해서 낯선 덴마크 미술을 보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지속적으로 덴마크 황금시대 미술 작품들도 테마를 잡고 기획해서 전시를 하는 듯하다. 지난 과거의 전시와 앞으로 다가올 전시들을 관심을 갖고 찾아보며 덴마크 그림이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