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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꽃 Aug 12. 2024

과몰입에 빠진 엄마의 반성

여는 글

사람마다 덕질의 방식과 깊이는 다르다. 나에게는 이제 하루에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요즘 뭔가에 단단히 빠졌구나”라고 먼저 알아차릴 정도로 내가 티를 내는 편이다. 스스로도 내 관심사가 빠르게 바뀌는 모습에 종종 놀라곤 한다.      


영화 <20세기 소녀>를 보면서는 ‘풍운호’라는 캐릭터에 잠시 빠졌다. <힘쎈여자 강남순>을 볼 때는 남주나 여주보다 ‘류시오’가 더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류선재’는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덕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선재 업고 튀어>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주인공 임솔(김혜윤)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던 아티스트 류선재(변우석)의 죽음을 겪고, 그를 구하기 위해 2008년으로 타임슬립을 하는 구원 로맨스다. 임솔은 15년 동안 네 번의 타임슬립을 하며 류선재를 지키려 한다. 이 드라마는 아름다운 영상과 감정이 극대화된 대사들로 큰 사랑을 받았고, 그 여파는 마치 <모래시계>가 방영될 때와 같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처음엔 그런 파급력을 가진 드라마일지 의문이었다. 1화에서 하반신 마비로 삶을 포기하려는 임솔에게 류선재가 라디오에서 “오늘은 살아봐요. 날이 너무 좋으니까”라는 말을 하며 내일을 선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임솔은 이 말을 계기로 밴드 ‘이클립스’의 팬이 되어 그들의 콘서트를 찾아가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게 다였고, 솔직히 오글거리는 대사들에 뻔한 전개가 눈에 보여 하차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라마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는지 2화까지 넘어갔고, 그 2화의 엔딩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 뭐야, 잠깐만! 선재가 임솔을 먼저 좋아했어?’ 그리고 4화에서 ‘선재가 다 알고 있었구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쳤다, 이 드라마!”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나는 제대로 입덕하게 되었고, 16화까지 단번에 정주행했다. 심지어 한 번은 여주의 시선으로, 또 한 번은 남주의 눈으로, 그다음에는 대사를 필사하면서 세 번 이상 다시 봤다. 왜 이 드라마를 한국에서 ‘월요병 치료제’라고 불렀는지 공감이 되었고, 나에게도 매 순간의 치료제였다. 특히 변우석 배우가 연기한 ‘선재’는 그저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속 임솔의 대사인 “내 인생의 빌런은 나야”는 나 자신에게도 깊이 와닿았다. 그동안 내가 변우석 배우를 응원하지 못한 나 자신이야말로 나의 ‘빌런’ 같았다. 이번 덕통사고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컴퓨터 배경화면과 휴대폰 잠금 화면은 모두 변우석으로 도배되었고, SNS 알고리즘도 전부 변우석으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BTS 하나만을 위해 가입했던 위버스에 변우석 팬덤까지 가입해버렸고, 공식 팬 카페에도 들어가 정회원이 되기 위해 애타게 기다렸다.


어느 날, 거실에서 덕질을 하며 휴대폰에 저장된 변우석 사진을 보고 웃고 있는데, 여덟 살 된 딸 예주가 물었다. “엄마, 엄마는 우리보다 이 삼촌이 더 소중한가 봐. 글 쓸 때도 그렇게 안 하더니 어떻게 이 삼촌한테만 이래?” 그 말에 순간 ‘내가 뭔가 대단히 잘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질 생활 30년 동안 이렇게 빠져 우선순위가 뒤바뀐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 덕질이 내 일상과 삶에 미친 영향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지켜온 덕질 철학은 ‘너도 좋지만 내가 좋아야 한다’이다. 남편을 10년 전에 선택한 이유도 그와 함께라면 영적으로,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모나 배경이 아무리 좋아도 나와 함께하는 동안 감정적으로 퇴보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92년 신승훈을 시작으로 수많은 음악가를 덕질하며, 그들의 음악은 나에게 글을 쓰는 에너지를 주었다. 노랫말 하나가 내 마음을 어루만졌고, 새로운 은유적 표현은 나를 더 성장시켰다. 나는 그렇게 단어의 힘을 배우며, 조금씩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도 있고 두 아이의 엄마인 내가 배우 한 명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일이 나의 직업이면서도, 그 일을 뒤로한 채 덕질에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딸의 말 덕분에 나의 덕질 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변우석의 팬덤 ‘통통이’들이 내가 시간을 정해 덕질을 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에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이들에게도 미리 “엄마 잠깐 쉬고 올게”라고 말한 뒤, 그 시간 동안 위버스, 팬카페, 스레드 등에서 변우석 배우의 소식을 확인한다. 그 후엔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들의 필요에 맞춰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최근 변우석 배우가 팬미팅에서 손편지로 남긴 글은 나의 덕질 철학과도 맞닿아 있어 공유하고 싶다. 불현듯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을 만큼 좋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덕질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행복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오래오래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걸어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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