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노트 Apr 21. 2024

세 자매가 함께한 비오는 토요일


토요일 오전, 사무실에 들렀다가 근무가 취소되어 친정에 들렀다. 지난주 왼쪽 눈 백내장 수술을 받은 엄마가 기력이 없다 하셔서 언니들이 수육을 준비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점심을 먹은 뒤였고 빗속을 뚫고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하여 드디어 친정에 닿았다. 배불리 점심을 먹은 부모님과, 둘째 셋째 언니 이렇게 넷이 모여 있었다. 


엄마는 여전히 기력이 없어 보이셨고 눈에 띄게 야윈 모습에 웃음기도 사라지셨다. 항상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하시는 엄만데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20년 전에 넣어 둔 엄마 보험 덕분에 이번 치료 값은 청구 비용보다 넉넉히 나와 잠시 기뻐하시더니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며 언니가 내가 오기 이전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부모님과 우리 세 자매가 도란도란 티브이를 보며 시계가 3시를 향해 가자, 엄마는 어서 가서 쉬라며 비가 더 오기 전에 얼른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엄마가 몹시 피곤해 보였기에 우리 세 자매는 그런 엄마를 걱정하며 친정을 나섰다.



김해에서 올라온 둘째 언니는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하자 했고 우리 동네 주차하기 편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비 내리는 창을 바라보며 우리 세 자매는 엄마에 대한 걱정부터 각자 집안의 대소사를 얘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엄마는 비 오는 날 운전이 걱정되어 어둡기 전에 보냈는데, 딸 셋은 커피숍에서 수다 떠느라 기어코 어둑해지는 저녁을 맞았다. 


이제 일어나자며 가려는데, 둘째 언니는 그래도 서운한지 형부에게 전화해서 양해를 구하더니 우리끼리 저녁까지 먹고 가겠다고 했다. 나도 남편이 집에 있으니 별 걱정 없었고 셋째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세 자매가 모이기도 쉽지 않은데 우리는 내친김에 매콤한 주꾸미 집으로 향했다. 


누가 봐도 자매로 보이는 우리는 앞치마를 하나씩 목에 걸고는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언니 동창 얘기를 하다가 그 시절 우리 동네 함께 놀았던 모든 친구들의 이름이 다 거론되었다. 누구는 서울서 성공했고, 선머슴 같던 그 애는 호주로 이민을 갔고, 누구는 재테크를 잘해 큰 부자가 되었다는 둥, 언니가 말하는 대부분의 이름들이 기억이 가물거리긴 했지만 한 동네 살면서 잡기 놀이와 숨바꼭질을 함께 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계속 어려웠었다. 하지만  그전에 새로 지은 집이며 자동차는 가지고 있었기에 겉에서 보면 굉장히 부잣집처럼 보였다는 걸 언니의 이야기로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은 언니가 가끔 아빠 차로 등교하고,  3층 양옥집에서 살았기에 부잣집 친구로 기억한다며 몇 년 전 동창회에서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우리 세 자매는 얼마나 껄껄 넘어갔는지 모른다. 다들 공납금을 못 내서 얼마나 반에서 창피했는지, 사고 싶은 물건, 먹고 싶은 음식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랐다며 서로가 견뎌낸 힘든 시간을 토로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 둘째 언니가 대학 시절 내내 직접 도시락을 싸 다녔다는 얘기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찌나 웃기던지. 도대체 반찬을 뭘로 들고 갔냐며 김치와 멸치 밖에 기억이 안 난다며 또 깔깔 웃어댔다.


그렇게 주꾸미를 1인분을 더 추가하여 먹고 나자 배도 부르고 갈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둘째 언니가 커피도 샀기에 저녁은 내가 사겠다고 일어났는데, 팔힘이 세기로 소문난 언니가 갑자기 내 팔목을 잡더니 그대로 의자에 나를 주저 앉혔다. 그리곤 번개보다 빠르게 계산대로 가서는 카드를 긁었다. (진짜 멋져 보였다 ^^) 서빙하시던 아주머니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재밌다며 자매들이 많아 좋겠다고 한마디씩 거드셨다. 


유치원 원장님인 둘째 언니는 항상 아이들과 함께라서 그런지 참 곱게 나이 드는 것 같다. 언니도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며 이 나이에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언니는 차로 집 앞까지 태워준다 했으나 나는 배도 부르고 빗속을 걷고 싶다하여 아파트 입구에서 내려 천천히 빗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곧 5월에 있을 어버이날 만남을 기약하며 집으로 올라오는데 마음이 참 행복하고 뭉클했다. 함께 기뻐하고 고민할 언니들이 있다는 게, 힘들었지만 잘 길러주신 부모님, 그럭저럭 다들 무탈한 우리 형제들이 얼마나 삶에 힘이 되는지 다시 한번 내 삶에 감사했다. 


친정은 주말마다 우리가 만나는 아지트다. 부디 그 장소가 오래오래 지속되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팔순을 넘긴 부모님을 볼 때마다 과연 얼마나 이런 시간이 있을지 마음이 아련해오지만, 그래도 우리 5형제가 함께 하니 마음이 놓인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토요일,

언니들과 함께한 시간이 벌써 그립고 또 다음이 기대된다.  




작가의 이전글 봄에 대한 감사와 예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