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단상담을 좋아한다.
집단상담 효과는 1년 유지되기도 한다.
집단의 생생한 역동은 마치 시원한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것 같다.
집단상담이란 집단원 10명 정도와 집단 리더로 이뤄진 심리상담 그룹을 말한다.
집단상담은 집단원 수만큼 많은 심리 역동이 펼쳐진다.
리더도 집단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 복잡한 심리 역동에 함께 한다.
역동 참여는 주로 피드백을 통해서 이뤄진다.
물론 말을 하지 않는다고 역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피드백과 자기 개방은 집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얻어가는 것이 많다.
집단원은 집단을 신뢰하는 정도에 따라 개방을 한다.
신뢰할 수 없는 집단에서는 피상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집단상담에 참여할 때는 흔히 별칭을 짓는다.
별칭을 짓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별칭은 자신의 마음, 특성, 근래 중요한 자신만의 이슈 등으로 짓는다.
그러다 보니 여러 해 동안 집단상담을 참여하다 보면 별칭이 달라지기도 한다.
물론 각각 다른 집단상담에 참여하면서 같은 별칭을 계속 쓰기도 한다.
별칭이 달라지거나 같은 별칭을 사용하거나 나름 이유가 있다.
나는 2, 3년 동안 같은 별칭을 사용하다가 다른 별칭을 사용하기도 하고 과거 사용했던 별칭을 다시 꺼내 쓰기도 했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별칭은 이대팔이다.
작년 겨울 참여했던 집단상담에서 사용한 별칭이기도 하고 5, 6년 전에 사용한 별칭이다.
그전에는 마음햇볕이란 별칭을 사용했었다.
2023년은 마음햇볕 별칭이다가 2024년에는 이대팔 별칭을 사용한 거다.
우선 “이대팔”이 무슨 뜻인지부터 설명해야겠다.
성이 이고 이름이 대팔이라고 생각하는 집단원이 많았다.
그런데 이름이 아니라 2:8이란 뜻이다.
이 별칭은 군상담일 때 참여했던 집단상담에서 처음 썼다.
당시 나는 군에 들어간 민간인으로 조직에서 소외감을 느꼈고 군에서 심리전문가라 불렀으나 응급 구조대나 장식처럼 느껴져 직업적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나는 8이 아니라 2처럼 느껴졌다.
2와 8인 상황에서 분투하는 기분이었다.
버티고 있지만 8에게 눌리는 마음이 힘들었다.
링 위에서 근육질 상대에게 위협을 당하면서도 링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기분.
약자.
나는 왜 8이 아닐까?
8이 되면 어떤 기분인가?
억울하고 화나고 짜증 나고 슬펐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 2이기도 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지는 못했지만 살아남았다.
작은 존재감이나 선명한 2가 되고자 애썼다.
2:8을 마음속으로 읊조리니 이름 같기도 했다.
내 이름 같았다.
그래서 집단상담 별칭을 적을 때 한글로 “이대팔”이라 적었다.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꽤 힘을 쓸 것 같지 않은가?
대팔이.
이대팔 속에는 결코 꺾이지 않는 내 마음이 담겨 있다.
2:8은 밀리는 것 같지만 이대팔은 씩씩하다.
약간 무식한 느낌이 들지만(혹시 이대팔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면 어쨌거나 저의 주관적 느낌임을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힘이 느껴진다.
군상담관을 할 적에는 힘이 필요했었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 필요했었다.
그 별칭을 작년에 다시 꺼낸 것이다.
내가 다시 졸아붙는 상황이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이대팔이었다.
5년 전쯤 군상담관을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그만두고(내가 브런치 스토리에 연재했던 “어쩌다 심리상담사”에 곡절이 쓰여 있으니 참고하시길.) 드디어 8이 된 것이 아니다.
나는 2도 8도 아니었다.
꺾이거나 꺾이지 않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대팔을 소환한 것은 이대팔은 내 깨달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2나 8 모두 고통이다.
2였을 때는 약자라서 고통스럽고 8이 되자 가지게 된 것을 잃을까 두려워진다.
8이 강자라고 한다면 강자가 누리는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게 된다.
힘이 없어서 힘들 때나 힘이 있어서 좋을 때나 결국 다 고통이다.
좋고 나쁨을 통합하는 것을 넘어서 좋고 나쁨을 떠난다.
이대팔의 힘이 없거나 있거나에 영향받지 않는 평온에 머무는 것을 지향하게 되었다.
작년 집단상담에서 내게 이대팔이란 별칭은 한층 가벼워진 나 자신에게 보내는 축하의미였다.
앞으로 다른 집단상담에 참여하게 된다면 어떤 별칭을 쓰게 될까 싶다.
2025년이 가기 전에 집단상담을 할 것 같은데 그때 별칭을 소개하겠다.
만약 지금 집단상담에 참여한다면 “멈춤”으로 하겠다.
나는 상담을 할 때 종종 내담자들에게 “멈추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내담자들은 의아해한다.
뭐든 해야 나아지고 달라질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어떤 내담자들은 화를 내기도 한다.
더 많이, 빨리 무엇인가를 해야 될 것 같은데 멈추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숨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았는데 나아진 것이 있나?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끊임없이 말을 하고 돈을 벌고 사회에서 권장하는 삶의 단계를 통과했지만 나아졌나?
바쁘게 살다 보면 결과처럼 부록처럼 행복이 딸려올 것이란 환상에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쁘게 움직이는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는 게 아닐까?
멈추는 것은 성실하게 사는 것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다.
잠시 숨을 돌리자는 것이다.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다.
멈춰서 나를 보는 것, 마음을 보는 것은 환상에서 깨어나 진짜 삶을 살게 한다.
멈춤은 호흡의 가운데 지점이며 명상과 같다.
쓰다 보니 집단상담을 하고 싶어진다.
집단상담이 내 삶의 멈춤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