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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주 Jan 05. 2025

사계절의 맛_겨울

12월이면 어김없이 할머니는 동지를 대비해 팥죽을 끓이셨다. 

팥은 귀신을 물리친다고, 텁텁한 맛을 싫어하던 나에게도 꼭 한 그릇씩 권하셨다.


“동지엔 팥죽 한 그릇이라도 꼭 먹어야 한다잉. 그래야 귀신이 도망가지.”


그 말씀을 들으며 억지로 숟가락을 들고 팥죽을 먹었다. 

방과 화장실 모서리마다 삶은 팥을 올려놓으셨던 할머니. 철없이 뛰어다니다가 팥을 밟아 으깨버리면, 화가 나서 괜히 할머니께 짜증을 내곤 했다. 

그땐 이런 미신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고 투덜거렸지만, 이제는 내가 동지마다 팥죽을 끓이며 남편에게 “꼭 한 그릇 먹어야 한다”라고 잔소리하고 있다. 철없던 시절의 내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1월 1일이면 늘 할머니와 함께 옥상에 올라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전날 저녁 뉴스에서 일출 시간을 미리 확인하신 할머니는 정확히 맞춰 날 깨우셨다. 새벽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어서 해를 보러 가자”며 나를 흔들어 깨우시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려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군말 없이 일어나 따라갔던 기억. 


해가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하늘과 신경전을 벌이다 보면 어느새 손발이 꽁꽁 얼어붙고 콧물마저 차가워졌다. 그러다 마침내 해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 때, 숨을 고르며 빠르게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이불속에서 한숨 더 잤다.


잠에서 깨어나면, 부엌에서는 이미 떡국 냄새가 솔솔 풍겼다. 

잘게 다져진 소고기와 쫄깃한 떡, 노란 달걀노른자와 흰자 고명이 얹어진 떡국 한 그릇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이걸 언제 다 먹지” 싶었지만, 국그릇을 싹싹 비우는 건 늘 시간문제였다.


“떡국 먹으면 한 살 더 먹는 거야. 올해도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며 나에게 한 그릇 더 떠 주시던 할머니.


추운 새해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할머니와 함께 떡국을 먹었던 그 순간은 따뜻했다. 

한 살 더 먹는 것이 두려운 나날들이었지만, 

할머니와 함께 또 한 해를 맞이할 수 있음에 감사했던 그때가 그립다.


2025년 새해는 할머니와 함께 하지 못했지만, 2026년 새해에는 다시 꼭 함께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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