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면 간식으로 삶은 밤이 식탁에 올라왔다.
껍질 속 알맹이만 파내 설탕을 솔솔 뿌린 밤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어금니로 밤을 깨물면 ‘톡’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신기해서 따라 해보려 했지만, 할머니께서는 위험하다며 삶은 밤을 절대 그냥 건네주시지 않았다. 작은 티스푼으로 밤 하나하나를 정성껏 파내 설탕을 뿌리고, 우유와 함께 주셨다.
퍽퍽한 밤을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다, 목이 막힐 즈음에 우유 한 모금을 들이켜 밤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녀니까, 이렇게 편하게 간식을 먹을 권리가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걸까?
정작 할머니는 부엌 구석에서 부스러기만 드셨는데도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쳤던 내 어린 시절이 문득 부끄럽게 떠오른다.
가끔은 이런 마음이 궁금해진다. 나는 아직 자식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자식이나 손주에게 맛있는 걸 하나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할머니는 우리가 자고 있는 새벽이면 자갈치시장에 다녀오셨다.
자갈치시장에 다녀오신 날이면 양념게장이 식탁에 올랐다. 좋은 물건은 새벽 일찍 다 나가버린다며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시각에 일어나셨다.
싱싱한 게를 손질해 바로 양념한 게장은 밥도둑이었다. 밥 두 공기는 기본이었다.
할머니는 발라 먹기 쉬운 게 몸통 부분은 내 앞에만 놓아주시고, 젓가락으로 파먹기 힘든 다리 부분은 엄마나 아빠에게 밀어주셨다. 아빠는 살이 통통 오른 몸통을 먹고 싶어 하셨지만, 할머니와 나는 눈빛을 교환하며 모두 내 몫으로 가져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빠 죄송합니다.
이제는 할머니 음식을 흉내 낼만큼 요리를 할 줄 알지만, 아직도 양념게장은 도전조차 못 해본 어려운 요리 중 하나다.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레시피를 여쭤보면 늘 같은 답이 돌아온다.
“힘든 걸 왜 할라카노. 먹고 싶으면 말해라, 할미가 해다 줄게.”
이젠 거동도 힘드신 분이, 내가 힘들게 요리하는 모습을 도저히 못 보시는 우리 할머니.
아직도 내 칼질이 서툴고, 양념 간도 못 맞추는 아이로 보이나 보다.
어른 취급받는 날보다 지금이 더 좋다.
매일 투정 부리는 아이로, 할머니께서 "내 손녀"라 불러주시는 지금 그대로 남고 싶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그냥 할머니 곁에서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