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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주 Dec 22. 2024

사계절의 맛_여름

더워지는 날씨와 함께 떠오르는 것은 진한 콩물이다. 

비록 할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에서 사 온 콩물이 내게는 여름의 상징이었다. 위생 봉투에 담긴 투박한 콩물과 우뭇가사리. 할머니는 얼음을 다섯 개 동동 띄워 콩물에 우뭇가사리를 잘게 부숴 넣으셨고, 우리는 말없이 숟가락을 바쁘게 놀리며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곤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콩국수라는 음식을 사먹게 되었는데, 너무 낯설었다. 20년간 콩물과 우뭇가사리만 먹어왔던 내게 소면이 들어간 콩국수는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아까운 콩물을 소면이 빨아들이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끼함까지 더해지니 김치를 아무리 곁들여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마 는 평생 소면이 들어간 콩국수와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채소를 싫어하는 내가 유일하게 예외로 두었던 것이 바로 호박잎이다. 

여름이 다가오면 할머니께 매일같이 묻곤 했다.

“할머니, 호박잎은 이제 시장에 나왔어요? 언제부터 먹을 수 있어요?”

“아직이다. 쪼매만 기다리라.” 

시장에 갈 때마다 호박잎을 찾으셨던 할머니. 여름이 되면 할머니는 내 입맛에 맞춰 호박잎을 삶아 주셨다. 푹 삶아 손만 대도 으스러질 만큼 부드러운 호박잎에 할머니표 강된장을 얹어 밥을 싸 먹으면 공기밥 두 그릇은 금세 비워졌다.


에어컨 없는 할머니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피서는 베란다에서 먹는 김치비빔국수였다. 

초장에 소면을 비비고, 설탕에 버무려 잘게 썬 김치를 고명으로 올리면 끝나는 간단한 요리였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 입맛을 되찾는 데 이만한 메뉴는 없었다. 사실 입맛이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노란색 박스테이프로 귀퉁이를 감아 놓은 청록색 플라스틱 의자와 옻칠이 벗겨진 낮은 나무 상을 베란다에 펼치고, 할머니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국수를 먹던 시간. 그곳이 나만의 특별한 바캉스였다. 

가끔 의자 틈에 엉덩이가 끼어 아파했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웃으며 깔깔대곤 했다. 


지금은 베란다마저 확장해버린 아파트에 살고 있어 그 시절의 추억을 다시는 흉내 낼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자주 떠올리고 애써 기억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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