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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Aug 28. 2024

내가 버티고 설 수 있는 이유

엄마에게, 선물이에요.

번아웃이 왔다. 다들 나에게 왜 그렇게 아등바등 애면글면 사느냐고 한다. 주말에는 굳이 애들 데리고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서 좀 쉬라고 한다. 근데 내 상황이 되어 보라지. 집에서 쉬는 게 쉬는 것인지.


아침 여덟시에 나의 하루는 저물고 또 다른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혼자 오롯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아침 8시에 끝난다. 그리고 나는 생생하고 정신없으며, 나를 소진하는 하루를 맞이한다.

회사가 먼 남편은 아침 일곱시에 집을 나서 밤 아홉시에 귀가한다. 토요일에도 근무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대부분의 시간, 육아와 가사는 나의 몫이다.


아이 둘을 부랴부랴 깨운다. 요거트, 시리얼, 딸기잼 바른 식빵. 아니면 계란 후라이? 아직 눈도 못 뜬 아이들에게 뭘 먹을지 결정하라고 채근한다. 그리고 정신없이 움직인다. 솜씨가 없는 나는 머리 가마도 제대로 못 탄다. 그래도 되는 대로 둘째 뽀뽀의 머리를 묶는다. 아침잠이 많아 유난히 굼뜬 첫째는 안아 들어서 욕실에 밀어넣어야 한다. 씻고 나서도 같은 말을 열번은 해야 움직인다. 8시 45분. 모두 멈춰!!! 이제 무조건 나가야 돼! 무조건!! 엘리베이터 눌러 놔! 아이 둘을 아파트 복도로 내몰고 매일 신는 샌들에 발을 우겨 넣는다. 그리고 부랴부랴 나오면 아이가 물통을 안 챙긴 것 같다. 대단이, 물통 챙겼어? 아니~ 이런! 물통을 가지러 집에 들어가면 아뿔싸! 내 핸드폰이 가방 안이 아니라 여기 있었네?


학교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대단이의 뒷모습을 일별하고, 뽀뽀와 함께 어린이집으로 달려간다. 그렇게 혼비백산 출근을 하면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힐 리가 없다. 주기적으로 업무 로테이션을 하는 회사인데 이번에 맡은 업무는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 자꾸 빠뜨리는 일들이 생기고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가 기억이 안 난다. 지금 뭐하려고 했더라? 머릿속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한 멍함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온다.


아이들 학원차량이 오는 시간에 맞춰 회사를 나선다. 고맙게도 나라에서 육아기단축근무를 허용해 줬지만 일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남편이 집에 오면 회사에 다시 가야 하나? 아니, 그렇게는 못해.. 내일은 본부로 출장을 가야 하니까 엄마에게 오시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 그럼 그 다음날 엄마한테 아이들 등원, 등교를 맡기고 일찌감치 출근을 하자.


주말에 튀긴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듯해 생선가게에 들러 고등어를 샀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검도학원 차량 시간을 또 맞추지 못했다. 사범님께 전화를 드렸다. 죄송하지만~~아이들 먼저 올라가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


집에 왔다. 마침 알라딘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박스 열기의 귀재 뽀뽀가 이미 박스테이프를 가위로 잘라 열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손을 씻는다. 부랴부랴 쌀을 씻는다. 고등어를 깨끗이 씻고 손질이 덜 된 지느러미를 가위로 자른다. 쌀뜨물에 고등어를 잠기게 넣는다. 아침에 그냥 두고 간 그릇들을 설거지한다. 밥솥을 취사모드로 설정한다. 고등어의 큰 가시를 손으로 발라 낸다. 다시 씻어서 소금을 뿌려 둔다. 카레가루를 뿌리고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굽는다. 와중에 아이들은 책을 보면서 나에게 폭풍처럼 말을 쏟아낸다. 엄마~나 OOO가 먹고 싶어. 여기 엄청 맛있어 보이게 나왔다. 엄마 XXX는 세상에서 제일 큰 ☆☆래. 한 번 보고 싶다. 엄마 나 @@@에 가보고 싶어. 굉장히 멋있을 거 같아.


그래? 그렇구나. 엄마는 전혀 몰랐네? 열심히 대꾸는 해 주지만 아쉽게도 아이들이 조잘조잘 전해준 이야기들은 하나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며 이제 나도 겨우 앉는다. 허기가 진다. 숟가락을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뒤집다가 다 부스러져 모양은 없는 고등어가 입에 참 달다. 고등어를 열심히 발라서 아이들 밥그릇에 올려 준다. 야채가 없어서 상추를 씻어서 쌈장에 묻혀 입에 넣어 주었다. 후식으로 준 샤인머스켓의 마지막 한 알을 놓고 아이들이 싸우기 시작한다. 어쩐지 조용히 넘어가나 했다. 지치고 지친 나는 별 거 아닌 일에도 왈칵 성을 낸다.


"야, 그만해! 그만 하라고오!!!!"


토요일에도 나는 쉬지 않는다. 성향상 서로 상성이 좋지 않은 아이 둘과 집에만 있는 것은 평일보다 더 힘들다. 마음이 힘들면 몸이 더 힘들다. 그래서 나간다. 첫째는 지역에서 운영하는 센터의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수업을 듣게 하고 둘째는 백화점 문화센터에 좋아하는 요리 수업을 등록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어떻게 저떻게 때우고 들어오면 금세 두세시가 된다. 아싸! 조금만 더 버티면 남편이 온다!


어떤 날은 평온히 지나가지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에 휩쓸리는 날들이 더 많다. 토요일까지 이렇게 쏘다니다 보면 나는 바짝바짝 말라 퍼석거린다. 무탈하게 흘러간 날은 "아, 오늘 정말 알차게 보냈다."라고 뿌듯다. 사건사고가 있는 날은 내가 왜 구지비 저 말썽쟁이들을 끌고 나가서 이런 사달을 냈나, 후회가 막심하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어느 날은 하하호호 반기는 가족들을 마주하고, 어느 날은 무거운 집안 분위기에 숨이 막힌다. 불쌍해라. 문을 열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할까?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한 것 같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 내면서도 자꾸만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온다. 나를 위한 시간 한 줌이 참 소중한데 그것을 만들어 내기가 여의치가 않다. 내 숨통을 막을 듯 밀려오는 일, 일, 일들에 가끔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싶다.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편지봉투를 보았다. 엄마에게 뽀뽀가. 한 달 전에 준 편진데. 이 봉투 버렸던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지? 의아해하며 봉투를 연 순간 나는 그만,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 쓰여 있었다. 한 달 전의 편지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글씨로 더 큰 마음이 담겨져 있어서. 선물이에요. 이 편지가 엄마를 위한 선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마치 내가 선물같은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말에 눈물이 핑 돌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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