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무니들에게 울타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일요일 늦은 오후, '아노라'를 보려고 동네 영화관에 갔다. 처음에는 야하고, 중간에는 웃기고, 마지막에는 슬픈 영화 '아노라'. '아노라'에 대해 검색을 해보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감독 '션 베이커'. 션 베이커의 전작 중에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여즉 보지 못한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플로리다 프로젝트'. 그래, 이번 주는 이 영화를 보고 글을 써 볼까?
아, 그런데 영화를 보자마자 그분이 오셨다. 현타라는 그분이.. 왜 내가 귀한 시간을 들여서 막 나가는 인생들이 애들을 방치해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작태를 봐야 하는가. 영화가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깜찍한 여섯 살 꼬마 무니의 쌍욕을 듣는 순간 혼미해졌다. "아니, 쟤 부모는 뭐 하는 거야?"
영화의 배경인 '매직캐슬'은 꿈과 희망의 나라 디즈니랜드에 이웃해 있다. 주변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처럼 쨍한 플로리다의 햇빛 아래 예쁘게 빛나는 이 보라색 건물은 겉보기와는 달리 오갈 데 없는 홈리스들이 주세를 내고 거주하는 숙박 업소이다. 무니의 엄마 핼리는 매직캐슬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다. 일을 할 의욕도 의지도 없다. 온몸의 문신은 다양성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해도 애 옆에서 내내 담배를 피운다거나, 애가 하루종일 뭐 하고 돌아다니는지 일도 관심 없는 모습은 발암 그 자체다. 핼리는 모텔에 낼 숙박비를 마련하기 위해 관광객들을 상대로 가짜 향수를 팔고 어린 무니까지 호객행위에 동원한다. 도덕적 기준이나 사회적 상식 따윈 헬리를 다 비껴간 듯 보여도 그녀는 자기의 방식대로 딸 무니를 사랑한다.
무니 역시 엄마의 삶의 방식을 흡수했을 뿐 아이답게 순간의 즐거움에 열심이다. 엽기적인 욕설로 꼴통짓의 서막을 알리고 아이의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천만한 일까지 벌이지만 그 이면엔 지금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싶은 가장 아이다운 마음이 있다. 안타깝게도 무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뭐야, 왜 저래?" 싶다가 어느 순간 영화 속 여섯 살 꼬마 무니와 우리 집 여섯 살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 여섯 살은 아직도 밤이면 잠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즐겁게 보낸 오늘 하루와 이별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자기 전에는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진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 아직 다 못했단 말이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모텔 매니저 바비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처발처발 먹는 무니. 기념품 샵을 놀이터 삼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무니.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면 당장 내달려가는 무니. 우리 집 무니도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지루해지면 엉뚱한 퀴즈를 내며 깔깔대기도 하고 발냄새 맡아 보라며 발을 떡 하니 내밀기도 한다. 일부러 헐렁하게 산 신발은 온 동네를 들쑤시느라 금세 걸레짝이 되어 발이 채 자라기 전에 수명을 다한다. 화단 턱, 야트막한 담장같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은 반드시 올라간다. 위험한 행동은 으름장을 놓으며 저지하려고 했지만 화단 턱 정도는 감수해 주기로 했다. 대신 손을 잡아준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와 우리 집 무니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이것이다. 손을 잡아줄 어른이 곁에 있는지의 여부. 아이가 불안감을 떨치고 즐거워지려면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아이가 멀리, 넓게 뛰놀 수 있도록 해주되, 확실하게 존재하는 울타리. 무니와 친구들에게는 울타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했다. 그만무새가 되어 '그만해, 그만, 그만하라고오오오'를 반복하다 보면 내 안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그런데 무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아이를 보니 '도대체 왜'에 대한 의문이 쉽게 해소됐다. 아이는 작은 모텔방에 가둬둘 수 없는 존재다. 짜잔 선물이야! 하면서 친구 젠시에게 무지개를 보여 주는 무니. 버려진 땅에 누워 있는 거대한 나무에서 놀면서 '쓰러져도 자라기 때문에' 이 나무를 좋아한다는 무니. 떠나기 전에 친구 스쿠티를 보고 싶다는 무니. 아이들은 시간을 냠냠 먹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자라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즐겁게, 온몸을 써서 웃으며.
내 아이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무니를 보니 더 이상 사고뭉치로 보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는 아이.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한 아이. 세상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
하루치 사건사고를 모두 치르고 돌아온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 잠이 들 때 작은 안도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충분히 잘 놀았으니 오늘은 기꺼이 보내주고 더 재밌는 하루가 될 내일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