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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니홉 Jun 27. 2024

덜컹이는 시골버스야, 너 정말 밉다.

살면서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을 뼈저리게 느낀 날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에 우환이 겹으로 왔다. 정말 '설상가상'이라는 한자성어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삶을 살다 보면 롤로코스트를 탄다. 저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도 하고, 저 바닥으로 한없이 가라앉기도 한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어머니께서도 공공근로사업 일을 하셨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시골의 어느 마을에서 일을 하고 시골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기사가 초보였는지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는지 운전을 미숙하게 하였다.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 속력을 줄이지 않고 빨리 지나쳐 버스 뒤쪽에 타고 있었던 나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부웅 떴다. 꽤 높은 지점까지 올랐다가 다시 자리로 떨어지면서 척추뼈의 손상을 입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출처: 포토뉴스, news.naver.com

 

  디스코 팡팡을 탈 때, 막 튕겨주면 들썩들썩하며 신나게 웃으며 놀이기구를 탄다. 그것처럼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 한 번 튕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웃으면서 버스를 탔으면 좋았을 텐데. 나의 어머니께서는 정말 재수 없게 척추를 다치셨다. 척추가 부러져 아파 신음하며 버스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셨다. 119구급차가 도착하여, 어머니를 싣고 병원으로 후송하였다.


  부산의 큰 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하셨다. 부서진 척추 양쪽으로 철심을 넣어 척추를 고정하는 수술을 하였다. 꽤 큰 수술이었고 어머니의 옆에는 간병인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 옆을 지키며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간호하였다. 병간호를 할 때 아버지께서 속상하셨는지, 술을 드시고 싶었는지 밥을 제대로 안 드시고 술을 많이 드셨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께서 위병으로 다른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한 아버지의 옆을 지키는 역할은 나의 형이 하였다. 그 당시 형은 전문대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2학년말의 고등학생이었다. 부모님 두 분이 병원에 계시니 집안꼴이 말이 아니었다. 졸지에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은 두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며 부모님을 간호했고, 집안일은 두 형제가 어떻게 어떻게 하루하루 하며 살았다.


  당시 기억나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 나의 점심도시락 반찬은 항상 '군만두'였다. 급식을 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가던 시절이었는데, 반찬을 하기도 힘들뿐더러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군만두 반찬만 싸갔다. 점심시간에 나는 군만두를 꺼내 놓고 다른 친구들의 반찬을 나눠 먹으며 밥을 먹었다.


출처: 블로그, 리쓰리월드


  또 다른 장면은 형이 깍두기를 담겠다고 무를 깍둑 썰어서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렸다. 당시 인터넷, 유튜브가 있었다면 레시피를 찾아봤을 텐데, 그냥 말 그대로 무와 고춧가루 범벅이 되었다. 맛을 내기 위해 젓갈을 넣는다는 것을 몰랐었다. 결국 그 깍두기는 다 버려야만 했다.


  당시 나는 고3 올라가기 직전의 고등학생이어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다녔었다. 형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우리 집에 불어닥친 태풍의 눈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식구들은 난리가 나서 태풍에 휩쓸려 날아가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나만 혼자 태풍의 눈에서 고요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하루는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니 아무도 없는 그 상황이 너무나도 슬펐다. 부모님 두 분 다 병원에 계시고, 형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러 가서 나 혼자 뿐이었다. 덩그러니 혼자 집에 있는 외로움과 슬픔이 한순간 몰려와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혼자 몇십 분을 펑펑 울었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한 번 쏟아지니 끝도 없이 나왔다.


  그러다 현관 옆에 두었던 아버지의 담배가 눈에 띄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담배를 조금씩 태우셨다. 그 담배를 본 순간 담배를 피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 연기로 지금 이 시련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허파 깊이 빨아들이니 기침이 콜록콜록 나왔다. 몇 번을 참고 담배 연기를 허파 속으로 넣으니 기침이 안 나오고 참을만했다. 그러면서 내 몸이 휘청함을 느낀다. 그때 담배 맛을 알게 되어 십오 년 정도 담배를 피우고 현재는 안 핀다.


출처: 쇼핑, smartstore.naver.com

 

  시간이 흘러 아버지도 퇴원하고, 어머니도 퇴원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수술 후 회복할 때까지 갑옷 같은 척추 보호대를 몸통 앞뒤로 차고 생활하셨다. 우리 네 식구의 생활이 다시 안정적인 모습으로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그 몇 개월이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아주 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 터널에는 끝이 있었다.


  나는 고3 수험생이 되어 학교, 집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대학교를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집안 형편도 그렇고, 나의 현재 위치에서 가장 괜찮은 선택은 '육군사관학교'라고 판단하였다.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체력 검정도 합격하였다. 이제 수능 점수만 어느 정도 나오면 나는 '육사생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능 점수가 평소보다 낮게 나왔다. 그리하여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가지 못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고2 말부터 이어진 집안의 그 일들로 나의 성적이 좀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가 다치던 날, 버스기사가 시골길에서 운전만 조심스럽게 했더라도 어머니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면 어머니께서 다치실 운명이었나 싶기도 하다. 어머니가 예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사주에 늙어서 등에 칼을 대는 일이 생긴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인가.


  아무튼 그날 덜컹이며 달리던 시골버스야, 너 정말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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