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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니홉 Jun 13. 2024

내가 살면서 부모님께 가장 잘한 효도 세 가지

아들이 잘 되는 것이 곧 부모님의 기쁨이자 자랑이었습니다.

  요즘 매일 이곳에 글을 연재하기 위해서 하나씩 에피소드를 적고 있다. 한 편, 한 편 글을 적으면서 부모님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 마음을 치유받는 느낌도 든다.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이라,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적으면서 내 마음이 평온함을 느낀다.


  이번에는 무슨 내용으로 글을 써볼까 고민하다가, '부모님이 밝게 웃으셨던 때가 언제였나? 기뻐하셨을 때가 언제였나?'를 생각해 보았다. 집안 형편이 가난하여 비싸고 맛난 음식도 드시지 못하고, 여행도 거의 가보지 못하였다. 한평생 돈 걱정, 자식 걱정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시다가 하늘나라를 가신 것 같아 참 죄송한 마음이 든다.


  부모님의 아들로서 '내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린 적이 언제인가?'를 생각해 본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는 가난하게 사시는 부모님을 보고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 밖에 없었기에. 공부 머리는 좀 있어서 성적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나의 성적표와 통지표를 보시며 흐뭇해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도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에 물기가 묻어 있다.


  나의 지나간 자랑을 적는 것 같아 조금은 낯 부끄럽지만, 내가 뭔가 성과를 이루었을 때 부모님은 나 자신보다 그것을 더욱 기뻐하셨던 것 같다. 힘든 삶 속에서 자식 농사를 잘 짓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다. 나의 자녀들은 자신보다 더 나은 삶, 더 풍족한 삶을 살기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기를.


출처: 블로그, 스피치마루지중계센터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새로 개교한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에 선배가 없이 1학년 만으로 학생이 구성되었다. 학생회장 선거도 1학년에서 이루어졌다. 그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나름 연설을 준비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학생들 앞에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선거 결과를 보니, 내가 전교회장에 당선이 되었다.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전교회장의 어머니가 학부모회장도 되는 구시대적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학부모회장은 사적으로 어느 정도 학교에 일정 금액을 기부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전교회장이 되어 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셨을 것이다. 목욕탕에서 일하시는 분이, 학부모회장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학교 행사에 참석하고, 일정 금액을 학교에 내야 함은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학교에 행사가 있는 날, 일을 쉬고 꽃단장을 하시어 학교에 방문한 어머니가 생각난다.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생각을 하셨을까? '아들 덕분에 학부모회장이라는 직책도 맡게 되네.' 하시면서 본인을 자랑스러워하셨을까? 요즘 말하는 웃픈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돈도 없는데, 돈 쓸 곳이 생기고, 그렇게 행사에 참석하면 돈을 못 벌고. 하지만 자식이 전교회장이 되었다니, 뭔가 엄마로서 뒷바라지는 해야 했을 것이고.


  이것이 나의 첫 번째 효도이다. 어머니께서는 그때의 일 년이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이 힘드셨을 것 같다. 학교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서 인사를 해야 했고, 학부모회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해야만 하셨다. 하지만 그 상황이 뿌듯하고 즐거웠으리라. '나의 아들 덕에 이런 삶도 살아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일 년을 사셨을 것이라 내 맘 편한 대로 짐작해 본다.


출처: 포토뉴스, news.naver.com


  시간이 흘러 나는 중3이 되어 고입 준비를 하였다. 당시에는 고교 평준화 전이라 자신이 입학하길 원하는 학교에 지원하고, 연합고사를 쳐서 성적이 되어야만 입학할 수 있는 고입제도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고입을 위해서 엄청난 공부를 하였고, 만약 지원한 고등학교에 떨어지면 재수를 하여 다음 해에 고입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학생도 학부모도 고입이 엄청 큰 숙제였다.


  고입 연합고사는 총 200점 만점이다. 필기시험 180점, 체력 20점이다. 체력은 거의 20점을 다 받고 필기시험을 얼마나 잘 보느냐가 관건이었다. 모의고사를 치면 10개 안쪽으로 틀렸는데, 만점을 받은 적은 없었다. 진짜 고입 연합고사 시험을 치는 날이 되었다. 그날 내 평생의 운 중 많은 양을 끌어다 썼는지, 재수 좋게도 만점을 받았다. 긴가민가한 문제가 몇 개 있었는데, 확률적으로 대략 정답이겠거니 하며 찍은 것이 다 맞았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람의 한평생 인생 중에 한 번은 크게 별이 뜨는 때가 온다. 이번이 바로 큰 별이 뜬 때인가 보다!' 학교며, 학원에 플래카드가 붙고, 온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고입 만점자라며 고등학교 1학년 수업료도 면제되었다. 그것이 내가 부모님께 한 두 번째 효도이다.


  고입 만점자의 아버지는 술이 많이 취하셔서 집에 오셨다. 그날 목욕탕에 00시의 관계자라면서 공무원이 와서 술을 한 잔 거하게 사주었다고 하였다. 목욕탕 보일러 기사가 언제 그런 사람과 술을 먹어 보겠냐면서 아주 기분 좋게 술을 드신 것 같았다. 아마 아버지께서 살면서 드신 술 중에 가장 달달한 술이었으리라. 그날은 어머니께서도 술이 많이 취하신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시지 않으셨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서른 살이 넘었다. 다른 동기나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살고 있다. 왠지 나의 마음속에는 조바심이 들고, 앞 날이 걱정되기도 한다. 지금은 혼자 살고, 늦게 결혼하는 사람이 많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30살이 넘으면 결혼을 다들 하는 분위기였고, 35살이 넘으면 노총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33살에 결혼을 하였다. 보석 같은 사람을 만나 1년 정도 연예하고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귀여운 손자를 한 명 낳았다. 그것이 나의 세 번째 효도이다. 형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집에 있는 두 아들 중 누구라도 먼저 결혼을 하라며 부모님은 말씀하곤 하셨다. 내가 결혼을 하여 손자를 안겨 드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신 부모님은 많이 늙으셨지만, 손주를 안고 너무나 행복해하셨다.


출처: 블로그, Alice in Kufstein


  손주를 보시기 위해 우리 집을 방문하시고, 순주를 보여드리기 위해 고향집에 내려가곤 했다. 아기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영상통화를 하면 그 시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신 것이 티가 났다. 그 당시 손주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부모님의 낙이었던 것 같다. 애가 커서 유치원도 가고, 초등학교도 가는 모습도 보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린이집에 간 것만 보시고 두 분 다 이 세상을 떠나셨다.


  첫째와 나이 차가 6살 나는 둘째 딸이 있다. 그 애를 보면서 가끔 생각한다. '이 귀여운 딸의 모습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좀 더 더디게 이 세상과 작별을 하셨더라면 둘째 딸의 모습도 눈에 담고 가셨을 텐데.


  이렇게 나는 부모님께 크게 세 가지 효도를 하였다. 네 번째 효도는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네 번째 효도를 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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