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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니홉 Jun 06. 2024

식물박사와 산행하며 막걸리 한잔

아버지와 산에 올라 막걸리 한 잔 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산에 가서 나무와 풀들을 보면 그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나무의 이름은 '참나무', '소나무', '떡갈나무' 등 익히 알려진 나무는 좀 알지만, 이름을 모르는 나무들이 훨씬 많다. 풀과 꽃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유명한 '개나리', '진달래', '할미꽃' 정도는 알아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과 풀이 대다수일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각종 나무와 꽃, 풀의 이름을 참 많이도 알고 계셨다. 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도 한몫했을 것이고, 나무와 식물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다. 약초, 버섯 등에 대한 지식도 나름 습득하시어 발길 흔적이 없는 산을 돌아다니시며 영지버섯을 캐오기도 하셨다. 


출처: 블로그, 살며 사랑하며


  목욕탕 보일러 기사 일을 그만둔 후로는 공공근로사업을 신청하여 일을 다니셨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나무 가꾸기, 가지치기, 전기톱 다루기 등이었다. 나름 본인의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전기톱 다루는 일은 나무 보일러를 땔 때 많이 다뤄봐서 잘하셨고, 식물을 좋아하셨다. 공공근로사업 일을 하며 나무와 관련 교육을 다니시며 공부하는 것을 즐기시는 듯하였다.


  이제는 주말이 있는 삶이 생겼다. 주말에 가끔 아버지와 뒷산에 갔다. 가기 전에 가방 안에 간단한 안주를 챙긴다. 냉장고 안에 있는 반찬 중 괜찮을 걸 고른다. 김치나 콩나물, 장아찌 등 사실 안주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막걸리를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켜고, 입에 씹을 거리가 아무거나 하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방을 싸고, 컵을 두 개 챙긴다. 가는 길에 막걸리를 한 병 사서 가방에 넣는다. 뒷산을 함께 가는 목적은 막걸리를 한 잔 하기 위함이었다. 그냥 집에서 먹어도 되지만, 산행을 좀 하며 땀을 흘리고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한 잔 들이켤 요량으로 함께 산을 오른다.


  아빠랑은 그렇게 속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살갑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산을 오르며 아빠는 나에게 나무며, 꽃이며, 풀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사실 들어도 잘 기억도 못하고,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그 풀이 그 풀 같다. 나에게 식물 이름을 알려주는 아빠의 말에 호응을 하며 열심히 듣는 척하며 걸었다.


  그렇게 둘이 산을 오르던 그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아빠가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고, 난 그것을 들으며 둘이 함께 걷는 그 자체가 좋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어느 정도 힘도 들고 다리도 아프다며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의 바위 위에 앉는다. 항상 앉는 자리는 정해져 있다. 두세 군데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적당한 바위에 둘이 앉아 가방을 열어 막걸리와 안주를 꺼낸다. 나는 안주가 들어 있는 반찬통의 뚜껑을 열고, 아버지는 막걸리통을 휘휘 돌리신다. 컵 두 개에 넘치기 직전까지 막걸리를 따른다. 첫 잔은 둘 다 원샷이다. 잔을 살짝 부딪친 후, 목구멍을 활짝 열고 막걸리를 입에 털어 넣는다. 그 시원하면서도 알싸한 첫 잔을 느끼기 위해 우린 여기까지 걸어와 바위에 앉았다.


출처: 블로그, orada5


  아버지는 항상 두 컵에 같은 양으로 따랐다. 둘 다 술 먹는 것을 좋아해서 적게 먹기는 싫어함을 알기에, 그렇게 하신 것 같다. 시원한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막걸리를 천천히 한 잔 들이켠다. 김치나 콩나물 무침을 한 젓가락 입에 넣는다. 그것을 세 번 반복하면 우리의 '막걸리파티'는 끝이 난다.


  약간 알딸딸한 취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털레털레 내려오며 아까 들었던 식물의 이름을 또 듣는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과 그 식물의 생김을 연결하여 기억하지 못한다. 우린 막걸리를 먹으러 산에 갔던 것이다.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는 와중에 아빠의 식물 지식이 풍부해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으며 길을 걸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정정하시고, 함께 산에서 막걸리 한 병을 나누어 마시던 그때가 가끔 그립다. 우리에게 좀 더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막걸리를 마셨을 텐데. 매 번 막걸리를 먹으러 갔던 곳이 뒷산이라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에게 나무 이름이며, 꽃 이름을 신이 난 아이처럼 말해주시던 아버지. 좀 더 귀담아듣고 기억하려 애쓰지 않은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그냥 땀 흘리며 걷고 난 후, 막걸리 한 잔 같이 하기 위해 따라나선 것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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