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포장
아름답게 포장하기 힘든 내용이 있다.
격투기를 보면 위기에 몰렸을 때 탭을 치는 선수가 있고 기절할 때까지 탭을 안 치고 그대로 실신하는 선수도 있다. 인터뷰를 보면 탭을 치는 자기 모습이 멋이 없고, 남이 나를 꺾을지언정 스스로는 꺾이지 않겠다는 파이터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선수 생명이 깎일지언정 드물게 볼 수 있는 낭만과 멋이 느껴졌다.
여태까지 그림을 그려오면서 가장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하나 있다. 미술을 시작하고 3년 차 정도에 스스로 한번 꺾였을 때 그때의 감정을 주변에 얘기한 기억이다. 미술을 그만해야겠다며 그 이유로 재능과 운을 탓했던 시기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멋이 없었다. 자존감도 사라지고 평범해지며 색깔을 잃어버리는 기분과 경험에 적합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 나를 따르던 후배 중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하며 떠났을 때 그 순간 정신이 딱 들었다.
어떤 순간이 와도 스스로 꺾이면 안 된다.
물론 사람이 힘들 때도 있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으며 유지하고 발전해 나가기 어려운 상황은 가득하다. 하지만 그 힘듦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순간 나는 굉장히 약한 존재가 되곤 한다. 꼭 강해야만 되는 건 아니지만 강함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드라마 소설 등의 내용에서, 커다란 산 같은 인물이 시간이 흘러서 작아진 뒷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주변에 도움을 받는 루트도 있지만, 그 약세를 타고 들어오는 세력도 존재한다.
내가 꺾였을 때 알림으로 누군가의 위로를 받으며 도움을 받고 추진력 삼아 다시 도약하는 과정도 아름답다. 하지만 성장드라마에 있을 법한 이 과정은 현실에서 극히 드문 편이다.
조금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꺾였을 때는 보통 위로만 받고 싶으며,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는 검증을 받으며 합리화하기 위해 얘기를 꺼내는 경우가 많다.
그림에 대한 고민을 주변에 얘기 안 한 기간이 10년이 넘어간다. 그 이유는 그림에 대한 고민을 얘기로 나눈다 한들 크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던 방향으로 연습할 여지도 많이 남았고 새로운 방향 또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실행을 통해 더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푸념식의 고민은 무조건 마이너스가 된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약점으로 보여 쉬운 접근을 허용하게 된다. 단편적인 내용만 규합해 쉽게 단정 짓고 침범하는 내용에 굉장히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고민을 들어주는 상대방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체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시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상황에 맞는 자신의 의견을 풀어낼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내용은 검증되지 않은 제안인 경우가 많다.
고마운 마음과 도움은 비례하지 않는다.
전문가를 찾으려면 일반적인 시야에서는 구분하기 힘들다.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와야 가짜와 진짜를 가려낼 수 있는 선구안을 갖출 수 있다. 이런 연습이 되기 전까지는 해야 할 것들을 묵묵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외부적인 요인, 환경적인 요인, 사건 사고에 의해 잠시 꺾이더라도 그 마음을 끝까지 한번 숨겨보자.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게 강인도를 높일 수 있다. 숨기지 못한 순간들이 후회되는 장면으로 남는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어차피 넘어야 하는 과정과 과도기에서 참지 못하는 엄살 혹은 호들갑으로 보이기보다, 묵묵함을 유지하는 습관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언가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바닥 면이 항상 평탄해야 한다. 거칠고 요동치는 면이 있다면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이다.
그 평탄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층을 더 올려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