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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앤트 Apr 23. 2024

다잃음

행보

휴식이 가능한 날은 정해져 있다.

 

특별히 오래 쉬는 텀 없이 꾸준히 작업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쉬어도 괜찮은 타이밍이 있다.

외부일이 많아 평소에 그리던 양을 못 채우기 시작하니, 확실히 손 끝 감각은 굉장히 둔해진다.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그려 왔는데도 조금 소홀히 하자 재료를 잡았을 때 굉장히 어색한 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조금 허무하기도 하다. 

컨베이어 벨트 편에서 다뤘듯이, 쌓아 올리는 것은 어렵고 잃어 가는 것은 굉장히 쉬우니까 플러스 보다 마이너스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느낀 점이다.


쉴 수 있는 타이밍 

그림은 안 쉬는 것이 가장 좋다. 운동이나 음악등 다른 예체능 계열에서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약해지고 소모되는 신체 기관이 많다. 뼈, 근육, 인대, 피부, 성대 등 크고 작은 부상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림을 그리다가 특별히 약해지는 부위가 없다. 

굳이 꼽자면 터널 증후군, 각종 디스크들이 있는데. 보통 잘못된 앉은 자세에서 누적되는 부상이다. 그림으로 소모 됐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결국. 그림을 쉬게 되는 상황은 형편에 관련된 환경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큰 맥락으로 멘탈에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잘 안 그려진다. 지친다. 질린다. 힘들다. 어렵다. 짜증 난다. 막연하다.

그림을 그리다가 발생한 상황들에서 겪게 되는 이런 상황과 감정들에서 멘탈이 털리게 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놓아버리며 그림을 쉬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만약 앞으로도 그림을 오래 그리고 싶다면 이럴 때는 절대 쉬면 안 된다.

교과서적인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근거를 토대로 한 설명을 접하고도 쉬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개인의 자유다.




김앤트, 시범 프로세스, 27.2x37.2cm, 도화지에 연필, 2018



흔히 짬이라고 하는데, 누구나 어렸을 때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했던 것들이 한두 가지씩은 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공기놀이, 팔씨름, 종이접기, 팽이치기 등등.  

내가 잘했던 것들은 철봉에 매달려서 빙글빙글 돌기. 쌍쌍바 반으로 나누기. 높은 계단에서 점프하기. 햇빛 피해서 그늘로 다니기 등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유난히 즐겨하고 잘했던 것들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10~20년이 지나도 언제든지 다시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잘했던 경험은 과감한 행보를 만들고 성공률을 높인다.


어렸을 때 운동, 음악, 공부 등 제대로 익히 경우에, 전공을 바꾸고 다른 일을 하며 성인이 되었어도 일반인과 확실히 다르다. 그 짬이 절대 어디 가지 않는다. 

그 반대로 애매하게 했던 것. 애매하게 좋아한 것. 애매함의 기준을 넘지 못한 것들은 몇 달만 지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예시도 들기 힘들 정도다.

한 때 피아노로 바이엘(하)까지 교육을 받았었다. 근래에 피아노를 한번 쳐 보려고 했더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깐 배웠던 것. 어설픈 상태.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던 것들은 쉽게 마이너스로 흘러가다 삭제된다.  


만약 그림을 시작 단계. 한 장을 끝까지 그려 내지 못하는 상태. 심지어 입시를 하고 미대를 졸업했어도 확실한 체계가 안 잡힌 상태에서 쉬면 1년 안에 정보와 감각이 반이상 사라진다. 

어느 정도 선을 넘어 가 안정형이 되면, 그림으로 멘탈 털릴 일이 없다. 애초에 멘탈이 털리는 것은 현재 상태가 불안정한 성장기이기 때문이다. 아직 더 다듬어야 하는 상태다. 

이때 쉬게 되면 결국 그동안 배웠던 것들마저 다 잃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려 해 봐도 기반될만한 것이 없어서 맨땅에 헤딩하듯 막연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기억에는 그래도 나름 그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손도 못 댈 것 같은 악순환이 펼쳐진다. 그렇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빠지게 된다. 

너무 극단적인 것 같지만 주변의 90% 이상 다 이런 경험을 겪으면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쉬면 안 된다. 




김앤트, 시범 프로세스, 27.2x37.2cm, 도화지에 연필, 2018




그나마 휴식이 가능한 지점이 있다.

재료, 장르, 소재 상관없이 그림 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 낼 수 있는 순서가 정리되어 있고 실행할 수 있는 숙련도가 갖춰진 상태. 이 정도 레벨이면 그동안의 성장 경험들과 기억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왔을 때 조금 어색할 뿐이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시즌이 끝났을 때 쉬다가 시즌 때 다시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돌아올 수 있다.

흔히 손을 푼다는 얘기는 이 상태에서 복귀할 때 꺼내는 말이다. 정보와 감각을 반 이상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손을 풀 것이 아니라 더 연습해야 하는 상황이다.

연습은 그림 이해도에 관련된 카테고리들로 구성하는 것이 효율적이며, 이 내용들은 앞 내용들에 많이 다뤘으니 참고해 보자.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그려 나가 보길 권한다. 


피치 못할 사정을 줄이는 것도 노력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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