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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깎러 May 22. 2023

3. 가방 끈 늘리는데 소질이 있나 봐요.

전자과 박사인데요, 컴싸 석사를 한 번 지원해 보았습니다

어쩌다 학위 콜렉터?

TL;DR:

OPT 취업 허가도 받고 기왕 쉴 바에는 컴퓨터 과학 공부도 할 겸 석사 과정에도 지원해 보았다.

캘리포니아 내의 총 6개의 대학원에 지원, 그중 4개의 대학원에 합격하였고, 집에서 가깝고 가격이 저렴한 주립대학교에 일단 예치금을 걸어 두었다.


2022년 9월, 나는 지원했던 14개의 미국 회사에서 죄다 거절을 받았다. (여기에 잠수 이별도 포함했다.) 아내 써니는 영구 노동허가 승인(Permanent Labor Certification, PERM LC)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경제가 얼어붙으며 대기열이 점점 늘어나고만 있었다. 우리는 PERM 승인이 늦어지거나 잘못되어 나의 취업 허가(Employment Authorization)를 제때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천천히 걱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나의 석사 지원이 현실적인 옵션 중의 하나가 된 것도 이 때다.

박사 학위 소지자가 석사 과정에 지원하는 상황,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도 재미없는 농담 같이 느껴졌다. 취미로 학위를 수집하는 여유 넘치고 돈 많은 사람들이나 할 것 같은 일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석사 지원이 유일한 미국 취업 방법일 수도 있는 상황이 왔고, 어떻게든 우리를 합리화시켜야 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이유, 그리고 지원서 에세이에 열심히 썰을 풀어 가며 적었던 이유는 커리어 전환을 위함이었다. 적어도 어떤 회사에게는 '소프트웨어 지식을 가진 하드웨어 엔지니어' 또는 '하드웨어 개발 경험을 가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상당히 매력적인 지원자일 테니까. 이제 딱 졸업한 지 10년이 된 오래되고 오래된 학부 시절 나는 자료 구조, 알고리즘, 선형대수학, 이산수학, 컴퓨터 구조, 소프트웨어 공학 등의 소프트웨어 관련 수업들을 상당히 많이 수강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컴퓨터 과학자의 시선에서 수업들을 접해본 적이 없기에, 제대로 만들어진 커리큘럼을 통해 컴퓨터 과학을 배울 기회는 나에게 상당히 의미 있음에 틀림없었다. 젊은 개발자들과 교류하며 나의 낡은 소프트웨어 개발 지식을 새로이 할 필요도 있었다. 소위 제4차 산업 혁명이 제대로 일어나기 전 대학교를 다녔던 내가 이해하고 있던 소프트웨어 개발 패러다임은 이미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수준이기 때문이다. (라떼를 한 번 해 보자면 여러분, Docker가 제가 졸업하던 시기에 처음 나왔다...)

표면적인 이유라고 표현했지만 진지하게 커리어 전환을 고민하기도 했다. 내가 지원서를 쓰고 있던 시기만 하더라도 여전히 소프트웨어 일자리가 하드웨어 일자리보다 더 많았다. 지금도 자리가 없을 뿐이지, 여전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을 받는다. 지금은 신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채용공고가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이 시장의 경기는 워낙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내가 학위를 취득할 계획이었던) 2025년 여름에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른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의 소질이 있는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영타는 느리지 않으니 어떻게 한 번 해 봄 직 하지 않았을까? 다만 그전엔 돈을 내고 정규 교육을 받을 생각은 없었고, 짬짬이 LeetCode를 연습해 코딩 테스트(코테)를 보고 신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지원할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하튼 석사 과정에 지원하게 된 실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F-1) 비자에 따라오는 선택적 실습(Optional Practical Training, OPT) 취업 허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결국 내 목표는 미국 취업이었으니까. OPT 기회는 사람 당 이론적으로 총 세 번(학사 학위 수령 후, 석사 학위 수령 후, 그리고 박사학위 수령 후) 생기는데, 나는 생에 딱 한 번, 학부 3학년 여름부터 해 오던 연구실 인턴 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신청해 학부 졸업 후 2개월 동안, 사용했던 상태였다. 원래 OPT 기간은 학위 취득 후 1년이지만, 이공계(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STEM) 전공자의 경우 이에 더해 2년이 더 주어진다. 나는 이미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학사 학위 OPT 외에는 OPT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새로운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 OPT를 이용해 3년간의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 활동 중심으로 이뤄지는 대한민국의 공대 및 자연대 석사과정과는 다르게 미국 대다수 공대 및 자연대의의 석사 과정은 수업 및 프로젝트 중심으로 이뤄진다. 물론 이도 진리의 학바학 과바과가 적용되어 매우 드물지만 연구 중심 석사 과정도 있고, 프로젝트로 달달 굴려 1년 만에 무조건 졸업 후 취업하게 만들어 버리는 석사 과정도 있다. 내가 기존 석사 학위를 받았던 한 주립대 대학원의 석사 과정은 수업 및 프로젝트 중심으로 이뤄지는 과정이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속 연구실 없이 1년 반에서 2년 기간 동안 수업을 골라 들은 후 졸업 후 취업하였다. 다만 연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연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제공되었는데,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석사 첫 학기를 마친 후 연구실 활동을 시작하고 결국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연구실에 남았다. 나는 이제 전혀 학계에 뜻이 없기에 이번에는 당연히 연구 중심 석사 과정에는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공대 및 자연대 석사 과정의 또 한 가지 큰 차이점은 바로 학비일 것이다. 한국 학교에서 연구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석사생들은 연구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장학금이나 인건비의 형식으로 금전적인 혜택을 받는다. 보통은 학비를 면제하는 장학금이 제공되거나 아니면 학비의 상당 부분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건비를 받게 되므로 자비를 털어 학비를 충당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명목상 책정되는 학비도 그리 비싸지는 않은 편이다. 이에 비해 미국 대학교의 석사 과정 학비는 일단 청구서 상 금액 자체가 무시무시하고, 더군다나 외국인의 신분으로 그 학비를 조금이라도 경감받을 확률은 대단히 낮다. 대부분의 대학교에서 연구 조교 장학금 (Research Assistantship, RA) 및 수업 조교 장학금 (Teaching Assistantship, TA) 제도를 운영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전일(full-time) 박사 과정 학생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우선 배정되어 보통은 소진되기 마련이다. 석사 학생도 예외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아주아주 뛰어나 교수에게 간택을 받아 수업 조교가 되거나 운이 좋아 연구실에서 full-time 연구 조교로 활동할 기회를 얻으면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보통은 이것도 대단히 힘들다. 학교마다 너무나 많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 대학원 학비는 기본적으로 한 학기 천만 원을 우습게 넘어가고, 조금 유명한 학교들은 연간 원화 1억 이상의 학비+생활비를 부담해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보통의 대학원 지원자에게 학교를 고르는 데 가장 중요한 잣대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겠지만, 나에게는 학교의 위치 외의 다른 조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학비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는데, 일단 한국에서 모아 둔 돈이 조금 있기도 했고, 아내 써니가 흔쾌히 내 학업을 위해 학비를 제공해 주겠다고 해서 학비에 구애받지 않고 위치만 생각하고 학교를 고르기로 했다. 써니의 회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의 산타클라라 카운티에 위치해 있고, 집안 재정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써니가 출퇴근이나마 조금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이사 갈 아파트는 써니의 회사 근처에서 구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써니는 기왕 대학원 가는 거 주말부부 해도 괜찮으니 타 주의 좋은 학교들에도 지원해 보라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웬만해선 집에서 출퇴근을 할 요량으로 써니의 회사에서 자동차로 편도 2시간 거리 이내의 학교에만 지원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는 괜찮은 학교들이 많고, 덕분에 나는 아래의 훌륭한 여섯 개의 학교에 지원서를 넣기로 결정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를 감안해서 컴퓨터 과학 석사 학위를 제공하는 모든 주립대학교에는 지원서를 넣었고, 지원서를 안 써 보자니 그만 너무 아쉬워서 사립인 스탠포드 대학교도 함께 넣어 보았다.

UC 버클리, 스탠포드, UC 데이비스, UC 산타 크루즈, 산호세 주립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 석사 지원서를 쓰기로 했다.

실제 지원서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SFSU)를 제외한 5개 학교와 로스앤젤레스 주립대(LA State) 이렇게 여섯 군데 넣게 되었는데, 후술 하겠지만 급하게 대학원 입학자격시험(Graduate Record Examination, GRE)을 보기가 어려웠던 나머지 그렇게 되었다.


미국 대학원 지원에 필수적인 서류는 (1) 성적표, (2) 지원 동기서 (Statement of Purpose, SOP), (3) 이력서가 있다. 이외에도 학교의 재량으로 지원서를 통해 다른 잡다한 항목들을 요구하는데, 가장 많이 요구되는 추가 항목은 (4) 추천서, 그다음이 (5) 자기소개서 (Personal Statement) 등이다. 기존에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항목 중에는 GRE 점수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GRE 성적의 학생 평가 변별력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학교들이 해당 점수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추세에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기사들도 꽤 보인다.) 여기에 영미권 외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학생들에게는 보통 (6) 어학시험 점수가 요구되는데, 기존에는 거의 유일하게 TOEFL 점수만을 인정해 줬지만 점차 다양한 시험 점수를 인정하는 추세라고 한다. 나는 미국에서 학부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다행히도 대학원 원서 접수를 위해 TOEFL 시험을 다시 봐야 하는 불상사는 피했다.

미국 대학원 석사 과정 학생의 선발에는 다른 무엇보다 학부 성적이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연구 활동을 통해 학교의 명성에 기여해야 하는 박사 과정 지원자는 다양한 잣대를 동시에 엄격히 사용하여 선별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수업을 듣다 좋은 기업에 취업하여 학교의 동문회를 든든하게 해 줘야 할 석사 학생들에게는 무엇보다 학업 성취도와 더불어 성실함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10년도 전에 받아 둔 학부 성적을 더 예쁘게 만들 방법은 없으니, 별로 소용없겠지만 내 연구 경험이라도 무기 삼을 수 있도록 이력서와 SOP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원서 준비 과정에서 나에게 의외의 복병은 추천서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력서와 SOP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적어도 한 번 준비해 본 경험이 있어서 적어도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추천서는 학교마다 다르지만 많게는 3부 정도를 요구했는데, 보통 자기를 잘 아는 교수님의 추천서와 1부와 현 직장의 직속 상사님의 추천서 1부를 받기를 많이 권장한다. 나는 이미 학부를 졸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니 학부 교수님들은 나를 다 잊어버리셨을게 분명했다. 박사 과정 지도교수님은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긴 했지만 미처 내 취업 결정을 알려드리지 못해 내가 학계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알고 계셨다. 이런 상황에서 석사 과정에 지원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다른 것 보다 크나큰 실망감에 사제의 연을 끊자고 하시지 않을까가 먼저 걱정되었다. 그래서 일단 가장 먼저 현 직장의 직속 상사이신 분의 추천서를 확보하기로 결정했고, 복무하던 연구소에서 나의 직속 상사님이셨던 연구단 단장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다. 또 다른 한 장의 추천서는 박사 과정 때 같은 연구실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계시다 몇 년 전 연구실을 따로 꾸려 독립하신 미국인 교수님께 받았는데, 워낙 막역한 관계였던지라 교수님께서는 조금 의아해하시면서도 흔쾌히 추천서를 보내 주셨다. 이렇게 나는 현 직장 직속 상사님의 추천서와 학교 교수님의 추천서를 쉽게 해결하였다.

마지막 추천서를 받을 사람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의 추천서를 쏙 빼면 내 대학원 시절 학업 태도가 의심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결국 큰 마음을 먹고 교수님께 추천서를 부탁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우리 교수님께서는 다행히 이메일에 답변을 보내주시긴 하셨는데, 걱정했던 것처럼 극대노하시진 않으셨지만 꽤나 혼란스러우신 것 같았다.

"... I think it would be better for you to apply for a postdoctoral position in the labs in the Bay Area. You should be able to get a position. ..."
"... I am a bit confused. I got the impression that you were dedicated to getting a position ... I advised you that it would be better ... It is all your personal decision. But I am concerned you are not making a sound judgement, at least for your career move."

학계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자마자 교수님께 말씀드렸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어떤 제자가 교수님께 감히 그런 상스러운 말을 쉽게 고할 수 있겠는가! 어쨌건 교수님께는 입이 열 개 라도 드릴 말씀이 없는 상황이긴 해서,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추천서가 저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추천서입니다, 이런 공허한 인사만 드릴 수 있을 뿐이었다. 비록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도 교수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교수님께서는 미운 제자에게도 추천서를 써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고, 이렇게 나는 세 부의 추천서를 모두 확보하게 되었다.


내가 지원했던 학교들의 지원 시기는 가장 빠른 스탠포드 대학교가 12월 초, 가장 늦은 산호세 주립대(SJSU)가 2월 말이었다. 지원할 학교의 선정은 10월 중 마쳤고, 11월 중 약 3주 동안의 일과 후 시간을 할애하여 SOP를 작성하고, 이력서를 손보고, 이런저런 다른 서류를 준비하여 대략의 지원 준비를 마쳤다. 이 시기에 추천서의 확보도 마쳤고, 외장하드와 이메일 아카이브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학창 시절 성적표의 정리도 마쳤다. 모든 학교의 지원서는 지원서 데드라인에 거의 맞추어 제출했는데, 캘리포니아대학(UC) 계열 대학교와 스탠포드 대학교는 딱히 그런 설명이 없었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학(Cal State) 계열 대학교는 지원서를 미리 제출하기를 권장하긴 했다. 지원서가 이미 준비되어 있어 사실 한 번에 모든 지원서를 준비해도 무방했는데, 혹시나 모를 상황에 금전적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지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때마침 이 시기 써니와 비슷한 시기에 PERM을 신청한 회사 동료들의 결과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고 있어, 써니의 PERM LC도 곧 나올 것 같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대학원 지원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써니는 PERM 승인을 받지 못했고, 나도 진행하던 입사 면접의 결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대학원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모든 학교에 계획대로 지원서를 제출했는데, 단 한 가지 예외로 SFSU는 LA에 위치한 같은 Cal State 대학인 LA State 대학으로 대체하였다. SFSU는 신기하게도 컴퓨터 과학 석사과정 지원자에게 아직까지 GRE 점수를 요구하는 학교였다. 이 학교만 유일하게 GRE 점수를 요구했던지라 한국에서 지원서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GRE 시험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도 GRE 시험은 딱히 잡지 않고 있었는데, 어차피 지원 데드라인이 꽤 늦은지라 일단 모든 다른 서류를 먼저 다 준비해 두고 혹시 필요해진다면 급히 시험을 봐 점수를 제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원 데드라인이 다가오자 나는 때마침 회사와의 면접 준비에 바빠지게 되었는데,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GRE를 봐서 인간 다운 점수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나는 SFSU 지원을 포기하고, 추천서를 하나도 요구하지 않는 파격적인 지원 과정을 자랑하던 LA State를 알게 되어 대신 거기에 지원서를 넣게 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원서비로 제출한 비용은 총 미화 730 불이었는데, 거의 100만 원에 달하는 큰돈이지만 지금 와서도 전혀 아깝지 않다. 마음의 안정을 얻는 비용으로는 충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Cal State 계열의 학교들이 $ 70 대로 저렴한 편이었고, UC 계열 학교와 사립 대학교는 $ 100을 넘는 높은 원서비를 요구했다. 아내 써니가 흔쾌히 모든 원서비를 지원해 주었다.


대학원 입시의 결과는 3월 17일부터 4월 12일 사이의 기간에 모두 받아 보았다. 가끔 들어가 눈팅하던 대학원 입시 포털 TheGradCafe에 따르면 예년보다 전반적으로 결과 발표의 시기가 조금 늦어지는 듯해 보였다. 경제 위기로 지원자가 많이 몰린 탓이었으려나? 어쨌든 나는 모든 결과를 4월 중순이 되기 전에 다 받아 보았는데, 지원 시기와 결과 통보에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어 보였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준 학교는 스탠포드 대학교였는데, 매우 깔끔하게 탈락 통보를 보내 주었다. 그다음으로 소식을 전달받은 학교들은 3월 말 합격 소식을 보내온 Cal State 학교들이었고 (LA State와 SJSU), 차례로 UC 산타 크루즈(UC Santa Cruz)와 UC 데이비스(UC Davis)에서 합격 소식을 전해 받았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보내 준 학교는 UC 버클리(UC Berkeley) 대학교로, 조금 기대했지만 역시나 불합격 소식을 전달받았다.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3월 20일에 고용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후에 모든 합격 소식을 받게 된 터라 그 기쁨은 조금 반감된 감이 있다. 어쨌든 고용계약서는 at-will 관계라 언제든지 회사의 의사에 따라 철회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혹시 몰라 집에서 가장 가까운 SJSU에는 소정의 예치금을 걸어 두었다. 나머지 모든 학교에는 정중한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고 입학 제안을 거절하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학원 입시의 결과는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치명적인 스펙으로 무장한 전 세계 컴퓨터 과학 학부과정 4학년생들이 대단히 많이들 지원했을 테니까. 내 객관적인 스펙이 초라한 것은 사실이다. 앞에서 공개한 바 있지만 내 학부 과정 학점 평점은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는 3.5/4.0이었는데, 학점을 짜게 주는 학교를 나와 석차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어디 내 세울 만한 성적은 아니니까. 학부 과정 중 연구활동에 참여하긴 했는데 겨우 두 번 정도 학회지 논문에 이름을 실었을 뿐, 아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나는 모든 불리함을 오랜 연구 경험으로 커버하고자 지원서를 작성했었는데, 이것도 탑급 학교 교수님들이 보시기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CNS (Cell-Nature-Science) 본지에 제1 저자로 논문을 실어 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여우와 신 포도'를 한 번 하자면 어차피 합격시켜 주셨어도 등록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기는 한데,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어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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