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의 사람들.
어느 저녁의 사람들
저녁 10시만 되면 배가 고프다. 과자나 빵 같은 간식을 먹기엔 부담스럽다. 어쩔 수 없이 뭐 먹을 거 없나 하며 숙소를 나와 길거리를 배회한다. 건강에 좋다는 콩으로 만든 뗌뻬고랭이 보이긴 하는데, 밥 없이 먹기엔 짜고, 이 시간에 밥을 먹는 건 과자를 먹는 것보다 더 부담스럽다.
자전거를 타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지나간다. 낭만 있게 저걸 사 먹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다가도, 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화장실을 몇 번 가야 할지 가늠이 안 된다. 먹은 만한 게 없다. 결국, 오늘도 최종 목적지는 생과일주스 가게다.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있는 생과일주스 가게는 구글 지도엔 밤 8시까지 한다고 쓰여있지만, 실제로는 밤 11시까지 한다. 생과일주스를 늦게까지 파는 이유가 뭘까? 비밀은 바로 노래에 있다.
생과일주스 가게 앞에는 항상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주로 서정적이며 잔잔한 인도네시아 노래를 부른다. 가끔 유명한 팝송을 부르기도 하는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인도네시아 노래인지 팝송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향이 있다.
주스집 사장은 마감시간이 지났음에도, 가게문을 열어두고 사람들과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른다. 아마도 가게 불빛을 조명삼아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그러다 손님이 와서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면 노래를 멈추고 달려와 주스를 만들어준다.
손이 지저분해서 ‘음식을 더럽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는데, 대부분 과일을 미리 손질해서 따로 보관해 놓은 상태라 별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아보카도 주스가 먹고 싶다.
아보카도 주스를 주문하자 사장님은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뭔가를 분주히 찾더니 가게 뒤쪽에 있는 큰 과일 바구니를 하나 들고 들어온다. 아마도 손질된 아보카도가 없는 모양이다.
마감 시간도 지났는데, 나 때문에 새로 과일을 손질하게 해서 미안한 마음에 ‘손질해 놓은 아보카도가 없으면, 다른 과일 아무거나 만들어주세요’라고 말하려는데, 인도네시아어로 말이 안 나온다. 그냥 쳐다보면서 기다린다.
주인아저씨는 면도칼 크기의 작은 식도를 꺼내 아보카도 껍질을 깎는다. 과육에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섬세하게 그리고 빠르게 칼을 움직인다. 군더더기 없는 손목 스냅으로 과일을 깎는 모습이 마치 달인을 만나다 인도네시아 편 과일 깎기의 달인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 윙~ 하며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아보카도 주스 한 잔이 만들어졌다.
아보카도 주스를 건네준 사장님은 쿨하게 노래 부르는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처음으로 아보카도 주스를 맛보는데 걸쭉하고 고소하니 건강해지는 맛이다. 맛있다.
가게 앞에 서서 주스 맛을 음미하는데,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외국인인 나를 의식한 걸까? 유튜브로 샘 스미스의 I‘m Not the only one MR을 튼다. MR과 기타 연주가 맞물리며 노래가 시작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웃음이 터진다. 음정, 박자 그리고 가사까지 단 하나도 맞는 게 없다, 서로 민망한지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데, 얼굴에 행복이 가득 차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고등학교 때 쉬는 시간에 얼굴만 마주 봐도 웃음이 나오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다들 잘 살고 있으려나? 30살이 넘어서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연락하려니 받는 친구도 부담스럽고 연락하는 나도 부담스럽다.
’ 오랜만이다 뭐 하고 지내냐?‘
이런 문자를 받으면, 이 친구가 결혼을 하나, 뭐 팔게 있나. 아니면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거지 하는 의심이 먼저 든다.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두자.
그래도 오랜만에 좋았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 고마우니 생과일주스라도 더 팔아줘야지. 아까 숙소 입구에서 담배 피우던 사람이 두 명 있었던 것 같은데 하며, 아보카도 주스 두 잔을 더 사서 숙소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