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의 강물로 살아보기 (1)
바라나시역 도착,
동트기 전의 어스름이 이곳의 매캐한 매연과 오묘히 어우러져 약간의 어지러움을 유발한다. 버스는 선잠에 시달린 승객들을 힘없이 토해낸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양팔을 하늘 높이 찌르고 허리를 길게 늘어뜨려 꽤나 깊게 호흡을 들여 마신다. 탁한 공기가 후각 신경과 폐부를 강하게 자극한다. 그러자 물이 되고 싶은 소망이 이제 곧 실현되리라는 기대가 선잠으로 졸린 상태의 나를 번뜩 흔들어 깨운다.
태양빛이 갠지스 강물을 밝게 비추기 전에 강가에 닿고 싶다. 그 시점, 그 순간에 강이 되어 저마다 흘러가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 풍광을 내 눈, 귀, 피부, 코, 입에 담고 싶다. 서둘러 오토릭샤를 잡는다. 흥정에 힘을 쓰고 싶지 않다. 강이 되기 전 관념이 주는 피로가 기대를 잡아끌게 두고 싶지 않다. 지금 나는 충분히 이완되어 있고 평안하다.
갠지스 강 여느 가트에 도착한다. 나의 바람대로 아직 동은 트지 않았다. 내가 소망한 상상이 현실에 비쳤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란 이런 것일까? 환희와 기쁨 등 긍정이 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해져 온다. 태양이 너무 높이 떠올라 접근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강물에 떠 있는 태양빛에 가 닿고 싶다.
강폭의 중간 어디까지를 오가는 배에 탑승한다. 강폭 중간 어디쯤에 이르자 조금 전 배를 탔던 저편에 있는 인도인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가트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목욕하고 빨래하는 사람들, 물과 함께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삶의 끝에 있는 사람들 등... 인도인들의 갠지스는 삶 그 자체다. 매일의 생활에서 강을 빼놓을 수 없고, 물과 함께 하루가 흘러간다. 그리고 영성의 상징인 강은 현실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죽기를 바라고 그 영적 소망은 계속해서 강물을 따라 흐른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다. 역에서의 어스름과 섞인 매캐한 공기는 어느덧 사라졌다. 습하고 꿉꿉한 강의 기운이 얕으막히 상쾌함을 준다. 해가 제법 올라와 이제는 눈으로 그것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해 봤는데 눈이 시리고 아프더라. 대신에 어스름으로 어두웠던 강물에 윤슬이 내려와 눈을 간지럽힌다. 새벽의 어스름과 강물의 습기는 바람막이 안쪽에 이슬 맺히듯 피부를 촉촉이 적시는데, 태양 빛의 열에너지가 따스히 내 몸을 감싸자 강물의 아지랑이가 나에게 훅 다가오는 듯하다. 입안의 단내는 더욱 증폭되어 갈증 나게 한다. 눈을 감고 피부의 감각에 집중한다. 머리가 이상하리만큼 맑다 못해 어지럽다. 나는 이것을 환희와 기쁨으로 해석했다.
나의 의지와 조절력이 오감에 닻을 내리자 현재는 내 것이 되었고, 조건과 이유 없는 기쁨과 행복까지도 내 것이 되었다. 온전한 여유는 연장되어 마땅하다. 나는 이곳에 좀 더 머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