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길 2, 카주라호 욕설 사건
낯선 사람에게 관심을 이렇게까지 많이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잔시 도착, 열차 내부 복도를 따라 출입문에 이르기까지,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에 목례와 옅은 미소로 화답한다. 열차 플랫폼에 발을 내딛자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유쾌하기도 한 달뜬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한다. 그들의 호기심이 담긴 온화한 시선은 이제 끝이다.
나는 카주라호에 가기 위해 잔시 버스 터미널로 이동한다. 낮시간의 터미널은 비교적 활기차다. 로컬 버스 승강장, 여행객은 현지인들의 이목을 끌기 쉬운 대상이다. 열차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지나친 관심 덕분에 이제는 주변인의 시선 하나하나가 지치기 시작한다. 밀집된 열차 공간은 피로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더구나 지난밤의 긴장을 계속해서 끌고 왔기에, 더 이상의 외부 자극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나의 욕구는 자연스럽다.
내 옆자리 그리고 앞자리의 인도인은 카주라호에 거주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나에게 쉼 없이 말을 건다. 무엇인가를 내게 판매하려는 건지 카주라호에 가면 자신을 따라오라는 둥...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대답할 기운이 없다. 그는 내가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올 수 없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불쾌한 표정과 단호한 음성 신호(NO!)를 보낸다. 결국에는 그도 나처럼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쉬이 잠들 수 없다. 이 버스는 오전에 탔던 잔시행 기차의 인도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들은 나를 경계하게 만들고 날서게 한다. 눈을 감거나 음악을 들으며 외부 자극을 차단하려 애쓰지만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늦은 오후, 카주라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수많은 인파가 내 주위를 둘러싼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들이 나를 향해 호객 행위를 한다. 나는 위협을 느낀다. 버스에서 동행(?)한 인도인도 다시금 적극적으로 말을 건넨다.
나는 참지 않아, 외마디 한국어의 욕설을 내뱉는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된소리의 꽤나 시끄러운 어떤 말소리를 내 표정과 몸짓과 연결지으며, 이 여행객이 자신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자동적으로 추론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고, 잠시 당혹감을 보이다 크게 웃으며 내 주변을 떠난다.
카주라호에는 이박 삼일을 머무를 것이다. 머물 숙소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내가 큰 소리로 불특정 다수에게 욕을 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위협에 꽤나 감정적으로 대응했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즉각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오로지 나뿐이기에, 욕을 했다는 사실이 미안하면서도 지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온화한 미소와 허용적인 태도로 시간을 끌면서 그들에게 정중히 거절하는 방식을 선택할 여유가 없다.
나는 자기표현이 서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감추며 타인에게 용인될 법한 생각과 감정을 띠는 것이 것이 익숙하고 편한 사람이다. 그런 방식이 지금까지 내 존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금 전 있었던 카주라호 욕설 사건은 꽤나 극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들은 비웃었을지언정...
내 감정을 참지 않았다. 그냥 그때 나는 지쳐 있었는데, 자극들이 갑작스레 더해져 화가 났던 것이다. 내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다. 인상 팍 쓰고 화를 표현하니 호객꾼들은 나와 좀 더 거리를 두었는데, 나름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욕은 안 하려고 하겠지만 좀 더 강하게 나를 표현해 보는 것의 순기능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며칠 묵을 만한 숙소를 찾아, 짐을 정리하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인다. 지금까지 인도에서 평안했던 느낌과 다른 또 다른 홀가분함이다. 긴장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긴장에 반응했던 나의 새로운 언행이 긴장에 대응하는 새로운 경로가 되었다. 그 경로를 따라 부정적 감정의 줄기가 뻗쳐 어딘가로 배출되었다는 그 느낌이 숨을 틔우고 나를 신선하게 한다.
다음 날 아침부터 카주라호에 있는 다양한 사원들을 둘러본다. 카주라호는 도시 자체가 문화유산이다. 힌두교, 자이나교의 사원들이 도시 곳곳에 있고 그 사원 자체가 커다라면서도 정교한 조각 작품이다. 8~12세기에 지어졌다고 하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도 되고 손상도 되었다. 더구나 이슬람 정복자들이 힌두교의 우상숭배의 상징을 의도적으로 파손해 조각상 일부가 파괴된 흔적이 많다. 도시 자체가 작품이기에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일이 꽤나 힘들 것 같지만, 이곳에서는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다. 나는 자전거 타기를 매우 좋아한다. 비슷하면서도 디테일이 다른 사원들의 형상들을 자전거를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저마다 관광객들이 사원을 즐기는 행태를 바라보며 명소를 구경하는 즐거움에 빠져 본다. 이동 간 간간이 아이들과의 자전거 대결은 보너스의 즐거움이다.
새로운 감정의 경로를 뚫었다. 자유롭고 즐겁다. 처음의 인상은 고되고 힘들지만, 카주라호 욕설 사건에 중심에 있던 나를 칭찬한다. 카주라호의 기억은 꽤나 오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