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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Aug 27. 2023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다시 한국 그리고 부산.


1년 전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떠나며 이민가방과 캐리어 8개, 개인 가방 5개를 가지고 갔다.

돌아올 땐 이민가방 2개가 줄었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짐이었다.

그걸 들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유로스타 타고 프랑스 파리로, 비행기 타고 인천공항에 내려 공항철도, KTX 거쳐 부산까지 왔다.

유로스타, 파리 지하철, 공항철도 엘리베이터에서 애 셋에 가족 수보다 많은 짐을 들고 낑낑대는 한 부부를 도와주신 런던, 파리, 서울 시민을 잊을 수 없다.

(공수표만 남발하는 핀에어, 이제 정말 부산-유럽 직항 취항 좀 하자.)

유로스타에 태울 짐들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집은 짐으로 난장판이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살림을 통째로 재편하겠다며 며칠째 집안 정리에 매달리고 있다.

10년간 쌓인 세간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 놀랐다.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할 물품만 몇 상자가 됐다.


짐 정리에 시차에 밤낮이 뒤바뀐 며칠을 보내다가 처음 집 밖에 나갔다.

어떻게 수입하는지 몰라도 외국 맥주를 1200원에 파는 등 여러 식품이 저렴하기로 소문난 동네 마트에 들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푼 가슴을 안고 마트에 왔는데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벌써 바뀐 지 9개월이나 됐다고 했다.

식육점부터 밀키트, 반찬까지 없는 게 없다며 많은 이용을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지하 마트 위 1층 상가엔 원래 다른 식육점과 밀키트 가게가 있었는데 가는 길에 다시 보니 밀키트 가게는 문구점으로 바뀐 상태였다.

상도의까지 언급할 상황은 아니겠지만 좀 씁쓸했다. 무한경쟁이고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저렴했던 맥주 가격은 온데간데없었고 물가는 1년 전보다 더 뛴 듯했다.

인근 대형마트에서 본 수박은 조그만 게 3만원, 당근은 하나에 2천원이었다. 비싼 물가를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와 1년 전 냉장고에 넣어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맥주를 마셨다.

일부러 숙성시키는 와인이나 위스키도 있는데 뭐 나름 나쁘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2022년 12월 1일이었던 파울라너. 뭐 나름 나쁘지 않았다.

1년간 아파트 지하주차장 한구석에 방치된 차를 만나러 갔다.

커버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고 바퀴엔 거미줄이 어지럽다.

방전될까 봐 빼놓은 배터리를 조심스럽게 연결하는데 스파크가 튀었다.

혈관으로 피가 흐르듯 차체 곳곳으로 전기가 퍼지는 고주파음이 들렸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시동 버튼을 눌렀다. 정말 감사하게도 드르릉 힘찬 엔진 박동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1년을 주인 없이 묵묵히 버텨준 차가 정말 고마웠다.


집에 온 순간부터 바로 에어컨을 켰다.

도저히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에어컨을 켜고도 습기가 가시지 않아 한편엔 묵혀둔 제습기까지 돌렸다.

밖은 습하고 후끈해 나가기 싫어지는 날씨였다.

후덥지근한 바깥공기가 무서워 문을 못 여니 먼지 쌓인 공기청정기까지 가동했다.

'이게 한국 여름이지'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스웨덴이 그리웠다.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라 땀방울이 송송 맺혀도 그늘에선 시원했다.

미세먼지 없는 청명한 하늘과 유화 같은 구름은 꼭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었는데.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선선해 외출하기 좋았던 스톡홀름이 자꾸 생각났다.


초등학생인 첫째와 둘째는 각각 6학년, 3학년 2학기로 복학한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도 잘 적응해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1년간의 공백이 있었기에 내심 신경이 쓰인다.  

막내는 집 앞 50m 거리에 다니던 유치원에 자리가 없다는 날벼락같은 소식을 들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곧 볼 수 있다며 좋아했는데.

정기 충원하는 시기가 아니다 보니 다른 유치원에도 자리가 없긴 마찬가지다.

복직 시기는 다가오는데 막내의 보육이 최대 난제로 떠올랐다.

거실 난장판 된 스웨덴 1년 살이 흔적들

연수를 마친 아내는 다음 주부터 회사에 출근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 정리만 하다가 갈 판이다.

고달프고 행복한(?) 삼남매 워킹맘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

나도 며칠 뒤 출근해야 한다.

첫 휴가 나와 복귀를 앞둔 이등병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맞벌이 부부의 네버엔딩 삼남매 귀가 퍼즐 놀이도 곧 펼쳐질 것이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출근하고 아이들 데려오고 퇴근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퇴근시간까지 어쩔 수 없이 학원 뺑뺑이를 돌고.

퍼즐을 맞추던 아내가 말했다.

"한국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네."


1년 만에 돌아온 집도, 세상도 똑같다.

고작 1년을 밖에서 살다 오면 미련하게도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하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여도 지금부터 살아갈 날들은 다르다.

조금 다른 삶을 살고 꿈꾼 경험은 이 땅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이라 믿는다.

나도 아내도 삼남매도. 각자의 꿈을 꾸고 조금씩 이뤄나가면서.

그래,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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