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켜주고 싶지만 방법을 전혀 모르겠다. 자칫 그녀가 부끄러워할,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 히어로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 고민을 해 봤지만, 내가 봤던 장면에서 이런 식의 상황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있다고 해도 그들과 나는 다르다. 기껏 갖고 있는 능력은 용기뿐인데,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점점 더 곤란한 상태가 되고 있었다.
분명 조금은 더울 수 있는 날이었지만, 땀을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 땀이 약간 맺혀있었고,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나고 있었다. 혹시 쳐다보았다가 더 민망하다고 생각할까 봐 급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의 종모양을 눌렀다. 신호음이 짧게 간 뒤 철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어?”
연결이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뒤의 재연결이라 걱정이 됐던 것 같다. 그리 흥분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차가운 기계 너머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따스한 느낌이 느껴졌다.
“수리 얼마나 걸려?”
고작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속으로 용기에 대해 곱씹고, 그것의 쓸모에 대해 되짚어 봤다.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철홍의 대답은 이어졌다.
“수리하시는 분이 지금 열일하는 중이야.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춰서 조금 곤란한 상태인 것 같긴 한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지 큰 문제는 없을 거래.”
아무래도 그의 말처럼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럴수록 은민의 상태가 걱정됐다. 아까보다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방법을 고민했다. 용기를 갖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순간 떠오른 기분이었다. 기기의 버튼을 누르고, 철홍에게 물었다.
“안쪽에서 문 열어서 나가면 안 되나?”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곳에 더 오랜 시간 있어도 상관없다. 은민이만 나가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발 긍정적인,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이 오길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간절한 바람일 뿐, 원하던 대답이 오지는 않았다.
“위험하다는데? 층마다 제동장치가 있어서 추락에 의한 문제 자체는 없을 건데, 각 층마다 충격이 생길 거고 그 과정에서 제동장치 고장 날 수 있으니 그냥 기다리래. 왜 그래? 뭐야? 혹시 장실이라도 급한 건가?”
그의 목소리는 아까까지 품고 있던 따스함에서 장난기 가득한 느낌으로 변화되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런지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은 원망스러웠지만, 장난기 있는 그의 목소리도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둘째였다. 은민을 쳐다보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은민아, 꽉 잡고 있어.”
용기라는 이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강제로 열고, 그녀를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이후 닥칠 수치심, 위태로운 상황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가운데에 나있는 긴 틈으로 엄지와 새끼를 제외한 세 손가락, 총 여섯 개를 비집어 넣었고 양 옆으로 힘을 주었다. 제발 무리 없이 열리기를, 위험한 상황이 되지 않고 열리기를 속으로 빌었다. 생각보다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많은 힘을 주었을 때, 조금 벌어진 느낌이었다. 그마저도 열린 것이라기보다는 틈을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내가 힘을 주어 얼굴에 열이 올라올 때, 그녀의 얼굴도 현재의 상황을 참아내느라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녀보다 빨리, 그녀보다 먼저 나의 열기를 방출해 내야 했다. 그녀보다 더 붉은 얼굴이 되기를, 그래서 그녀의 수치심 어린 얼굴을 가릴 수 있기를 바랐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힘을 주기를 몇 차례 반복할 때, 기기의 계기판에서 소리가 울렸다.
“야야, 하지 마, 그러다 떨어져! 조금만 참아!”
그러나 그의 말이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수리에 더 시간이 걸린다고 했고, 그 시간 동안 은민이가 참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가 창피를 느낄 상황, 수치심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받을 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하지 말라는 기기의 울부짖음을 무시한 채 안간힘을 썼다.
몇 차례 쿵, 쿵 거리며 충격이 전체적으로 울려 퍼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주었다. 힘을 주는 와중에 어딘가에서 봤는지, 들었던지가 명확하지 않은 정보가 떠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때, 바닥에 앉아 다리를 펴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고, 그녀만 그렇게 있으면, 설사 충격이 있더라도, 나는 다치더라도 그녀는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은민아, 바닥에 앉아서 다리를 앞으로 쭉 펴고 조금만 참아, 내가 금방 해결할게.”
혹시나 모를 충격에 대비해 그녀에게 자세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금세 고쳐 앉았고, 얼굴에는 당혹감, 인내, 걱정들이 뒤섞인 묘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더욱더 힘을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바람에 대한 응답이었을지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이던 문이 양쪽으로 살짝 열렸다.
안간힘을 쓴 결과 때문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홍이 말한 것처럼 열린 문틈으로 보인 모습은 정확한 층계의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완전히 가운데가 아니라 아주 약간 층이 져진 느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그녀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열면 그녀가 나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두 번의 충격음과 기가 전체가 밑으로 내려갔다. 결과적으로 나의 허리 부근까지 층이 올라갔다. 어쩌면 더 열다 보면 또다시 현재의 위치에서 어긋나 이전보다 더 내려갈 수도 있다. 그래도 망설일 틈은 없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용기라는 것이 준 것인지, 원래부터 내 안에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양팔에 힘을 주었고, 어쩌면 더 이상 짜낼 힘이 없을지 몰랐지만 계속해서 힘을 줄 수 있었다. 문은 이제 은민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열렸다.
앞에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고 괜찮냐는 물음이 들렸다. 누군가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구두나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이들 중 누가 말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위험하니 그만 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무리하게 열다 보면 추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어차피 문은 어느 정도 열렸고, 한 번의 충격이 더 와서 거의 내 가슴 부근까지 온 층이었다. 빠르게 은민을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은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충격들이 이어져서 놀랐는지, 이전의 표정에서 또 다른 모습을 담아냈다. 정말 다양한 표정을, 여러 감정을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은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 와중에 아름답다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실소가 터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냐는 자문만 하게 됐다. 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고, 그것이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지, 차가운 그녀의 손이 나의 손을 잡았다.
극도의 긴장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고, 힘껏 그녀를 일으켜 세워 내 쪽으로 당겼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나에게 아주 가깝게 다가왔고, 짧은 비명을 지른 뒤 내 품에 안겼다. 기분이 좋았지만, 그런 느낌을 오래 지속할 여력은 없었다.
“잠깐 실례할게.”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무릎 부근을 양 팔로 감싸 안았다. 양팔에 힘을 주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무릎이 내 얼굴까지 올라갔고, 바깥에서 그녀를 잡아주려는 팔들이 얼핏 보였다. 나는 도와달라는 말을 외치며 그녀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힘을 썼다.
눈앞에 보이던 신발들 사이로 뻗어진 팔들은 그녀의 양팔을 잡은 뒤 끌어올려 주었다. 그들의 친절함과 도움으로 그녀의 다리까지 틈으로 완전하게 빠져나갔다. 이제 내가 나갈 차례였지만 그때 큰 충격음이 다시 한번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의 층이 순식간에 머리 위로 올라갔다.
마찰음 같은 소리가 울렸고, 무엇인가 거칠고 강제하는 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철홍이 말한 제동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였던 것 같다. 그 소리는 계속되지 않았고, 제 기능을 끝낸 뒤 조용해졌다. 어쩌면 은민을 위해 한 행동을 통해 나도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 이상 힘을 쓸 여력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고, 설령 힘이 있다고 해도 다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위급한 상황은 이미 해결했고, 그 사이 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혹시 완전히 열려도 섣부르게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 이후 더 이상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기에서 철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오, 정신 나간 놈. 거의 다 됐데, 조금만 기다려.”
그의 목소리가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시선을 위로 올려 층계 표시가 보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정상적인 숫자가 다시 표시됐다. 4라는 숫자가 처음 보였지만, 금방 3이 됐고, 2를 지나 1이 됐다. 1층이라는 알림음이 난 뒤 눈앞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나는 발을 뻗어 밖으로 나갔다. 한도의 한숨을 짧게 내뱉는 동시에 누군가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은민이었다. 그녀는 눈에는 약간 눈물이 맺혀있던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조금 화난 모습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그 표정을 갖던 머리는 나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 있었다. 궁금했지만 가까이 있음으로써 더 진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에 취하고 있었다.
“바보야, 위험하잖아. 얼마나 놀랐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였고,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화가 난듯했지만, 그 뒤에 무엇인가 액체가 뒤섞여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은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의 향기는 몹시 달콤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나를 걱정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그녀의 어깨너머로 철홍이 걸어왔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 정신 나간 새끼 같으니.”
왜 그랬을까. 이 모든 상황이 더없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