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by 감상자

조심스럽게 은민을 따라갔다. 철홍의 말대로 티 내지 않으려고 했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있는 그녀는 사람이 많은 거리를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파도치는 바다를 열심히 헤엄치는 것 같았고, 어릴 때 보았던 인어공주를 떠오르게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때로는 한 사람, 두 사람, 많게는 여러 사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때로는 사선으로, 때로는 거의 바로 뒤쪽에 있으면서 그녀가 먼저 걸었던 거리를 따라가는 여정이 약간의 즐거움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아마 그녀는 사람이 없어도 앞만을 보며 걸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는,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앞을 당당하게 응시했으며,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에게 말을 걸 때도, 얼굴을 붉힐 때도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며, 당당함을 유지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녀를 마음에 담은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없는 알 수 없는 강인함, 고작 투명 인간이 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사람들의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따라가지 않게 됐다. 그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갈 뿐이었다. 이 때도 나는 그녀의 발뒤꿈치만 따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당당히 그녀의 어깨를, 등을 보며 걸을 것이라는 작은 다짐을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학원들이 늘어서 있는 여러 건물들 중 하나로 그녀가 들어갔다. 문제는 그녀의 뒤를 따라 같은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몇몇이 더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수업을 들을 수도 있고, 그 외의 이유 때문에 그곳을 찾았을 것이다.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일단은 철홍을 믿고 나아가기로 했다. 혹시나 그녀를 놓쳐버릴까 봐 최대한 빨리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층계를 알리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내리고 작은 수첩을 꺼내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했다. 화살표가 위로 향한 버튼은 붉게 빛을 내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그것이 꺼지고 앞의 쇠로 된 문이 반으로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는 네 명의 사람이 거의 가로에 가깝게 서 있었다.


과연 그 사람들이 타지 않은 상태로 나만 그녀와 함께 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철홍을 믿는 마음이 조금 더 크긴 했지만 불안감은 이따금 튀어나왔다. 길게 호흡을 내뱉었고, 그의 말대로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하면 된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그녀와 이런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그것은 금방 1이 되었고, 이제 문이 열릴 일만 남았다. 빨리 철홍이 모든 상황을 통제해 주길 원할 때 바로 옆의 비상문이 열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청소도구를 들고 가로로 서있던 사람들을 조금씩 밀어냈다.


“잠시만요, 여기 조금만 청소할게요.”


분명 철홍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건물의 이름이 적힌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고, 가로의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옆 엘리베이터까지 밀려났고, 거의 동시에 두 개의 문이 양 옆으로 갈라졌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그곳에 탔고, 나는 은민의 뒤를 따라 같은 기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바로 뒤따랐음에도 그녀는 작은 수첩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 뒤따라 탈것 같은 초조함을 갖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 아무도 타지 않은 상태로 문이 닫혔다. 그 공간에는 나와 단 둘이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 같았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는 손을 뻗어 15라는 제일 상단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말할 기회를, 그녀의 시선을 내게 돌릴 순간을 노리면서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숫자는 금방 6이 되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녀가 내릴 층계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이렇게 기회를 놓치게 될까 약간의 걱정이 앞서 있을 때, 진동과 함께 조금은 둔탁한 ‘쿵’ 소리가 났다. 숫자는 채 7로 되지 못한 상태였고, 금방 전원이 꺼진 듯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올려본 뒤, 종 모양의 버튼을 눌렀고, 통화음이 울렸다. 작게 딸깍 소리가 나자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여기 엘리베이터 멈췄어요.”


별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고, 그런 모습조차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역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어딘지 기분이 좋아졌고, 그럴수록 그녀와 어색하게 된 상황을, 냉랭한 기운을 빠르게 돌리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생각이 이어지고 있을 때 멈춰진 기기의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자음이 끼어 있었지만,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기기가 문제를 일으켜서 지금 빠르게 처리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통화음은 끊겼고, 그녀는 특별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다시 집중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상황을 만들어 준 것이 철홍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잠시 엘리베이터를 멈추고,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그에게 감사하게 됐고, 친구라는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그녀를 불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도, 어떠한 행동도 하질 못했다. 이런 나 자신이 답답했고, 기회를 만들어준 철홍에게 미안함이 생겼다. 몇 번의 심호흡 뒤,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집중을 하고 있는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몇 차례 건드려 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의 그녀는 누군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도 당당하게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살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아직까지 어딘가 차가웠지만, 알게 모르게 반가움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를 나 혼자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래 그녀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잘 지내고 싶다는 것이 나쁠까? 친구가 그만큼 힘을 실어주고 있는데 멍청한 행동만 하는 것은 실례가 분명하다. 빨리 입이 떨어졌으면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그러니까, 내.. 내가 할 말이 있는데.”


그녀와 교무실을 가던 그때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처럼 말을 더듬었고, 그녀의 눈을 피해 그녀의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해지고 싶고, 더 이상 투명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되뇌었음에도, 조금씩 나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점차 투명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따스한 무엇인가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바닥으로 떨구어진 얼굴을 위로 올렸고, 시선을 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투명해져 가던 내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형태를 찾는 것 같았고, 그녀의 눈이, 그 아름다움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할 말 있으면 내 눈 보고 똑바로 말해.”


그래 그 말이 맞다. 사과를 하건, 이전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내건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말해야 한다. 나는 과연 지금까지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보고 말한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어쩌면 눈이 아니라 그녀의 눈썹을, 코를, 입술을, 이마를 보았던 것 같다. 눈을 보는 듯한 느낌만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두 눈을 바라보았다. 검고 깊은 그 눈을 바라보니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미안해.”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고, 느꼈던 감정들이 샘솟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 말은 그녀에게 잘 전달됐을까. 어쩌면 이번에는 제대로 눈을 보고 말했으니 그녀에게 제대로 닿지 않았을까. 이것도 닿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계속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의 조마조마함이 무색하게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잘하네.”


이 말과 함께 살짝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눈은 이전보다 더욱 깊어진 것 같고, 그녀의 입술은 더욱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분명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미소가 어딘지 모를 용기를 주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 밖으로 나의 감정을 토해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네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는 것이 정답인지, 정답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겠어. 그래도 미안해. 그냥 그 상황뿐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서툴게 행동하는 내 모습이 미안해. 누군가와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맞는지도 모르는 내가 너무 미안해.”


원래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상태여서 감정이 격해진 것일까. 속사포처럼 쏟아지던 말들 사이에 신중하게, 훨씬 더 그럴싸하고 아름답게 전달하고 싶었던 말까지 섞였다는 것을 눈치채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었다.


“너를 많이 좋아해. 그래서 잘 모르는 나한테 화가 나. 말을 더듬는 지금의 상황도, 나의 모든 처음이 너라는 사실도 미안해. 그래도 좋아해. 너무 많이 좋아해. 정답지를 찾지도 못하는데, 어떤 사과가 맞는지도 모르지만, 이야기하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과 멀어지고 싶지 않고, 지금의 말들이 제대로 표현되는지 모르겠을 만큼 좋아해. 그만큼 좋아해. 아니 그보다도 좋아해.”


순식간에 좋아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표현하게 됐다. 감정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튀어나가는 것 같았다. 이것들은 내 의사가 아닐까? 아니 내 생각이고, 내 감정이고, 그것들은 나다. 나의 이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표현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감정을 전달할 것이다. 그중 하나라도 그녀에게 닿는다면, 결과적으로 닿지 않으면? 상관없다. 그때는 만 번이라도 할 것이다. 그녀에게 닿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닿아도 멈추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 그녀에게 진심이다.


그러나 나의 말이 끝난 지금, 정적만이 그곳에, 그 공간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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