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by 감상자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는 같은 반 아이들을 뒤로 그녀 역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도 학원을 가는 모양이다. 팔을 뻗어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아직 어떠한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쉽사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은 철홍에게 의지하고 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바보 같았지만,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용서받는 게 아직은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녀가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질 때쯤,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생각에 빠져 버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철홍의 목소리는 그 생각의 늪 속에 점점 빠져가는 나를 꺼내주었다. 뚜렷한 해결책도 없는 상태의, 그저 발버둥 치는 것만이 전부인 듯한 상태였기에 너무도 고마운 소리의 울림이 귓가에 울렸다.


“아니 그냥, 은민이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볼까 싶었지.”


나의 말에 그는 내 오른쪽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팔은 무거웠지만 든든했고, 온전히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이 무거운 손이 없었다면, 나는 무너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또 투명 인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서라, 괜히 아까랑 똑같이 반복되거나 더 안 좋아진다. 일어나. 나가자.”


우리는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에 놓여있는 음료수 잔은 음료의 차가움 때문에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나는 흐르는 그것을 계속 훔쳤다. 그것은 닦아내도 금방 다시 생겨났고, 그때마다 나는 반복을 했다. 시간이 지나 음료의 차가움이 사라지면 없어지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꼭 닦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또다시 그의 말에 현실로 급하게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자꾸만 생각이라는 늪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거기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고민만 하다가 황금 같은 시간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투명하지 않은 상태를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철홍에게 계속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형체를 잃어 갈 때마다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둘이서만 시간을 갖고 이야기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는 말을 이어갔고,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진작에 받아줄 수 있던 건데, 다른 애들이 보니까 민망해서 그럴 수도 있잖아.”


짧은 순간, 그녀와 단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인가 말을 할 때마다 누군가 지나가며 나의 어깨를 쳤고, 나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학교라는 공간을 제외하고 오롯이 단 둘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의 영화관이라면, 아무도 없던 영화관이라면 어떨까 싶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의 상상이 이어졌다. 말을 할 때마다 극장을 채우는 소리들이 우리의 어깨를 건드리고 말을 건넬 것만 같았다. 또한 전처럼 그 안에 우리 단둘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음, 문제가 있어. 평소에 은민이는 학교 끝나면 학원 가고, 세상에 단 둘만 있는 공간이 어디 있어. 결국 누군가랑 같이 있잖아. 지금만 봐도 그래, 이 카페가 아무리 조용하다고 해도 결국 사장님은 있고.”


나는 원래 논리적이지 못할 텐데,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단둘이 있다면 뭐든 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좋은 일은 없겠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를 고민해 봤을 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둘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아?”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단 둘이 있는 것은 환경적인 부분일 뿐, 명확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저 확률을 올려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멍청한 말만 내뱉을 뿐이라도 조금은 정답에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는데, 일단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솔직히 은민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이해 못 하겠고, 말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어쩌다 보니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됐다.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잘 모르겠다. 그녀의 기분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말한 것은 맞는지, 지레짐작으로 좋게 풀려고 했던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좋은 분위기로 남겨놓고 싶었던 욕심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나의 이 생각을, 불확실한 마음을 그대로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답 나왔네.”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에 철홍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의 말처럼 단순화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고민을 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고민하면 해결될 확률이 높을 테니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뭐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모르겠고, 이 사과가 맞는 건지 모르겠고,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고, 그만큼 좋아한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제대로 말한 적 없었고, 그 말이 정답인지도 알 수 없었으며,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난 한 번도 좋아한다고 해 본 적이 없어.”


생각을 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철홍의 말에 대답을 이어나갔다. 마치 반사 신경 때문에 툭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럼 평생 말도 안 하려고 했어? 뭐가 됐든 진심을 전해야지. 말로 안 하면 몰라. 그게 어떤 결과가 되든 말은 해야지.”


맞는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내가 그들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듯, 그들도 나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는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엉망이었다. 나의 생각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철홍과 빠르게 화해할 수 있던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속사포처럼 내뱉었지만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홀로 있지는 않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은민이에게도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제대로 진심을 전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철홍에게도 그렇게 나의 진심이 전달됐기 때문에 해결이 됐을 것이다. 운이라도 좋다. 도달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일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은 걱정하지 마, 이 형님이 만들어주겠어.”


그는 마치 어떤 일에 대한 해결책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단해 보였고, 의지할 수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가 느껴졌고, 안심이 됐다. 그리고 마치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작전을 수행하는 것 같았다.


“내일 은민이 학원 갈 때, 슬쩍 따라가서 같이 엘베 타. 둘만 타면 내가 알아서 멈춰줄게. 길게는 아니어도. 대충 30분? 그 정도 멈추면 둘이서만 이야기해 봐. 어때? 완전히 둘만 있는 거잖아. 고소공포증이나 폐소공포증 같은 거 없지?”


너무나 속 시원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럴싸해 보였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둘만 있는 공간에 온전히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이야기하기도 좋다. 그런데 그녀가 다니는 학원이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어떡하지? 너무 높지 않아서 계단으로만 가면 어떡하지?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끼어들면 어떡하지? 등 여러 변수들이 계속해서 머리를 스쳤고, 곧 입 밖으로 내 철홍에게 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통 학원들은 위층에 있는 경우 많고, 선민이 같은 경우는 분명 시간 아끼려고 엘베 이용할 거야. 또 계단으로 다니면 또 그대로 방법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타이밍이 좀 안 맞으니 내일을 노려보자. 내일 안되면? 또 기회 만들어줄게. 이 형님만 믿어.”


믿으라는 말이 그렇게 힘이 되는 말이었을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차가웠던 음료는 어느새 그 온도를 잃었고, 흐르던 물기는 사라졌다. 테이블이 조금 젖어있었지만, 함께 준 휴지로 닦아내니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음료의 차가움은 시간이 해결해 주었고, 그때까지 있던 흔적은 겨우 휴지로 해결이 됐다. 분명 의미 없는 행동으로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지만, 단순하게 해결됐다. 나의 문제도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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