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by 감상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에 철홍에게 다시 말을 걸어봤지만, 화가 많이 났는지 말 걸지 말라며 너무나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분명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는데, 그 차가움에 내 안에 있던 용기까지 완전히 얼어붙어 제대로 입도 떼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왔었다.


이내 은민에게 다가갔지만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나의 부름에 답도 하지 않은 상태로 펼쳐진 책만 보고 펜을 돌릴 뿐이었다. 차라리 나의 말을 가로챌 때가 더 괜찮았던 것 같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무서웠고, 그럴 때마다 발끝부터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 말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학교가 끝날 때까지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웠고, 무서웠다. 모래처럼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약간의 물만 있다면, 나의 손재주만 있다면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모래는 물이 말라버리고 바람이 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너져 내릴 것이다. 나는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분명 행복했었다. 즐거웠었다. 그러나 한 순간의 꿈처럼 모두 흩어져 사라진 것 같다. 손으로 확실히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갔고, 살짝 부는 바람에 모두 흩날렸다. 결국 내 손바닥에 남아있는 약간의 모래 촉감이 흔적으로써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도 어쩌면 그들에게 그저 약간의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아니 이미 손을 털어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이전과 다를 게 전혀 없는 투명 인간이 된 것은 아닐까. 지금 그들에게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일까.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듯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는 방 안에서 침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어디선가 바람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니, 감옥같이 자리 잡았던 쇠창살이 제거되어 있었다.


그날 완벽히는 아니었지만 분명 다시 달아놓았었다. 나의 착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잊혔다. 그냥 번거로운 작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분명 이곳에서 한 발짝 나가면서 달라졌다. 그러니 이번에 다시 나아가면 또 달라지는 게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달라졌을까? 한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금씩 창가로 나아갔다. 창문 밖을 바라보자, 얼마나 달라진 것인지 고민하게 됐다.


나는 그 한 발짝으로 무엇을 얻었을까. 분명 위대한 한 발이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 큰 것을 얻었던 것 같다. 그게 뭐였는지 전혀 모르겠다. 겨우 며칠 전이지만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뒤로 가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없던 완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 그냥 용기를 얻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용기라는 게 아주 사소하게 얻어지는 것이며, 그 사소함으로 크게 변화할 수 있었다.


외형의 변화는 뒤따라왔을 뿐, 나라는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용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의 주먹을 피했고, 짧았지만 그들 중 하나와 친구가 되었었다.


그러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아무런 확신도 없는데, 한번 더 뛰어내려 또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헛된 망상일까. 아니 나에게 그 한 발은 이제 필요 없다. 나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내가 혼자서 얻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지금은 단지 놀라서, 그들의 차가움이 생각보다 강해서 아주 잠깐 얼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까보다 더, 이전보다 더 그 용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타오르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차가움 들은 녹아내리고 사라졌다.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고, 나도 같이 화를 내면서 영영 아무도 없이 혼자일 것 같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용기를 내서 한발 더 그들에게 다가간다면, 설령 그들이 한발 더 멀어지면, 나는 두발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만이다.


한 번 생긴 용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분명 옅어지고, 점차 모양을 잃고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때는 또 다른 용기를 만들면 될 뿐이다. 문득 삐져나오는 과거의 내가 그것을 자꾸 가리려고 하지만 스스로 걷어버리고, 그날그날 새로운 나를 만들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이미 변화했다. 걱정할 것 없다. 크게 한 번 심호흡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야겠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연락할 수 있지만, 가까워지려면 전파로 연결되는 목소리나 얼굴이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분명 그들에게 다가갈 용기를 냈는데, 시간을 더 빠르게 당길 힘이 생기지는 않았다. 해가 뜨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이 평생의 시간보다 길고 느리게 흘러갈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고, 그렇게 평소보다 빠르게 시간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무리 느려도 결국 아침이 찾아올 것이고, 나는 학교로 갈 것이다.


철홍이 다시는 나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 녀석과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은민이 또 화를 내며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녀와 계속해서 할 것이다. 끝까지 좋아하고, 좋아하며, 좋아할 것이다.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가 바람에 날려갈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손바닥에는 아직 모래가 남아있고, 그 조차 없으면 어떠한가. 또 집어 올리고, 다시 올리고, 계속 올리고, 그렇게 손바닥 위에 쌓아 올리면 그뿐이다. 그것마저 떨어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들어 올릴 것이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단단하게 만들어 한 번에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그렇게 만들면 된다.


눈 감았다 뜨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이상 하다 보니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 된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던 둘을 만나러 갈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조금은 무서웠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공포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설령 영향이 있어도 충분히 받아넘길 수 있었다. 그만큼 그때의 한 발자국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다.


어쩌면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이 이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용기라는 큰 힘을 얻었고, 그 책임으로 두려움을 느끼지만, 결국 그것은 한 몸이며, 당연하게 뒤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내가 그것에 공포를 느끼고 두려워 회피하지 않으면 된다. 그럴수록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나의 일부가 될 것이고, 거기부터 또 시작할 수 있다. 아니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해낼 거니까. 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 투명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가 만약 이대로 물러난다면, 무섭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본다면, 더 이상 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며, 진짜 투명 인간이 될 뿐이다.


내가 그것을 원했던가. 아니다. 나는 원하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졌던 투명 인간에서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투명 인간이 되었으며, 더 이상 투명 인간으로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해가 뜨면, 학교로 가서 그들에게 내가 투명 인간이 아님을,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릴 것이다.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에게 말을 걸 것이다. 더 많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이며, 그들을 귀찮게 하고,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아니 필요치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고, 나를 필요로 하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나는 투명 인간에서 그냥 인간이 될 것이다.

이전 13화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