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하루의 시작이 기대되는 상황 속에서 두려움이 계속 생기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은 평화로웠지만, 그 평화를 비집고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갈팡질팡하는 마음 때문인지 시간은 끝도 없이 늘어지고 있었다. 내가 마주할 모든 것들이 모래처럼 사라질 것 같아 불안했고, 그 때문에 긴 시간이 안심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이 침묵을 부셔주길 원했다. 양 손바닥으로 볼을 두드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더 이상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두렵지 않고, 내 안에 용기라는 슈퍼파워가 있다고 되새김질했다.
두려움은 다시 기대감으로 바뀌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고, 심장소리가 교실 문을 넘어 복도에 올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조금씩 잦아들기를 기대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할 때 멀리서 들리는 듯한 누군가의 소리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웅성거림의 소리는 조금씩 커졌고, 그럴수록 나의 심장소리가 가려지는듯했다. 그 웅성거림에 리듬을 맡기다 보니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철홍일까? 은민일까? 누가 먼저 올지 궁금했다. 빨리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은 또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또다시 나만의 특별한 시간 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교실로 들어서는 누군가의 발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아무도 아니면 어떡하지 싶었으나 은민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은민아, 어서 와.”
나의 말에 그녀 역시 웃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어딘가 그늘이 느껴졌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이전의 미소와, 나에게 안기던 그때의 표정과 미묘하게 차이를 내고 있었다. 조금은 차갑게 느껴졌고, 그 때문이었을까 내 심장까지 얼어버릴 것 같아 빠르게 온도를 높이고 싶었다.
“무슨 일 있어?”
나의 물음에 자리에 앉아 책을 정리하던 그녀가 멈췄다. 일순간이었지만, 심호흡을 하는듯했고,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여전히 약간의 미소는 남아있었지만 그 차가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제 학원에서 간단하게 시험 봤는데 좀 그래. 별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갔다. 그녀의 옆에 서서 위로라는 것을 해야겠다 싶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잘은 모르지만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의 차가움을 녹이고 싶었다.
“학원 시험 조금 못 보는 게 어때서, 너는 실전에 더 강하니까 괜찮아.”
나름 위로할 수 있는 말을 나쁘지 않게. 아니 솔직히 잘한 것 같아 뿌듯함을 느꼈다. 지레짐작이지만 이 정도면 온도를 충분히 올릴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전에 보았던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높게 평가했고, 내가 생각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제 그녀가 별것 아니라며 나에게 웃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크게 벗어났다.
“뭐? 무슨 소리야? 네가 뭘 알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이 그래?”
나의 위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그녀는 그저 화를 내며 속사포처럼 나에게 쏟아낼 뿐이었다. 단지 공감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위로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어떤 바람도 그녀에게 제대로 닿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에게 닿지 못한 것들은 일순간 흩어진 듯했고, 그것들은 꽃가루처럼 날려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흡수된 것 같다.
“은민아 그게 아니라..”
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나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기분 별로 안 좋은데 놀리는 거야?”
분명 이전까지 우리는 좋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서로 웃었고, 장난쳤고, 즐거움만 있었는데, 오늘은 날카롭다. 그 날카로움에 베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대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은민아, 지금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조금만 진정하면..”
그녀는 또다시 나의 말을 가로챘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화를 냈다.
“흥분하다니 뭘? 왜 나를 이상한 사람 만들어? 말 이상하게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사람 성격 이상한 사람 취급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의 말을 가로채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아니란 거 알잖아. 그냥 걱정되고 위로하고 싶어서..”
나의 말은 끝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다다르기 전 계속해서 그녀의 말에 빼앗겼다. 마치 내가 말을 시작하면 어떻게든 빼앗아 자신의 목소리와 연결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몇 차례 말을 빼앗겼고, 그럴수록 소모전만 길어지고 있었다.
“말 좀 끊지 말고 좀 들어.”
순간 짜증이 많이 났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엇을 잘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일까? 특별히 문제가 있을 상황은 없던 것 같았다. 의문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고, 물음표가 이곳저곳 튕기며 방법을 찾고 있었다. 끝내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자 감정이 상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건넨 말이 제대로 끝나지도 않은 채 나에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나도 똑같이 그녀의 말에 쏘아붙였다.
“왜 말도 못 하게 자꾸 말을 잘라?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녀가 화를 냈다. 이번에는 말을 가로챈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닌 단절시키는 느낌이었다.
“왜 화를 내? 먼저 사람 이상하게 만들어놓고 왜 화를 내는데?”
나의 목소리는 분명 높아졌지만, 특별히 화를 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정 감정이 조금 커졌을 뿐이었고, 단지 진정시키고 싶을 뿐이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매서웠다. 강한 의지로 나를 보고 있었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화내는 게 아니라 자꾸 말을 끊으니까 그렇지. 나는.."
처음으로 말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또다시 반복될 뿐이었다.
“끊긴 뭘 끊어. 네가 말을 이상하게 하고 있잖아.”
그녀의 입장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강탈당했고,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상황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특별히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판단을 했고, 물러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감정을 갖고 있는 연인이라 해도, 반복되는 이 상황 때문에 감정이 계속 상하고 있었다.
“아 그만 잘라, 뭐 하는 거야 매너 없이”
감정이라는 것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보다 더 큰 육성이 나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생각하지 못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 같았으며,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 결국 그녀가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처 따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나의 말을 가로챘고, 우리는 몇 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내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끝나지 않는 이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 철홍이 교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에게 제대로 인사를 건넬 수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먼저 그녀와의 공방을 끝내고, 어딘가부터 꼬이기 시작한, 복잡하게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뭐야, 둘이 사랑싸움함?”
그가 교실에 들어와 마주한 것이 심각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감정적이고 날 선 말들을 날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풀어보고자 가볍게 말을 던진 것 같았다. 그러나 해결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날카로운 말로 그의 장난을 받아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장난을 하고 있어. 저리 가.”
나는 그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과열된 분위기가 조금 해소된 뒤에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종의 회피였고, 이 감정싸움이 끝나기 전에 다른 누군가와 감정을 섞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 그냥 싸우는 것 같길래 말리려고 했더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작은 소리로 욕을 내뱉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새롭게 발생한 또 다른 기류 때문이었을까, 그녀와의 말다툼은 휴전 상태가 됐지만, 교실 전체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이전에는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날짜와 전혀 맞지 않는 한파가 휘몰아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강제로 침묵을 하게 만든 듯 주변이 고요했다.
나는 제 자리에 서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철홍은 자신의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교실에 마치 우리 셋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셋만 있는 이 공간이 숨이 막히도록 갑갑했다.
두려움의 실체에 접근함으로써 모든 의문이 해결됐다. 결국 나는 혼자일 뿐이다. 아주 잠깐 환상을 맛보았을 뿐, 내 편은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결국 투명 인간이다. 그들이 했던 날카로운 말들은 나를 관통해 벽 뒤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그저 조금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외로움이 느껴졌다. 감정이 사무치게 다가왔고, 그 어떤 말보다, 폭력보다 잔인하게 나를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바라보던 밤하늘처럼 고요했지만, 그것은 침묵이었을 뿐이며, 고통은 유지됐다. 그저 아픈 신음을 참을 뿐이었다.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고통을 참고,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 바뀐 것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길고 긴 시간 속에서 혼자 가만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난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저 길었고, 그저 고통이었다. 해는 기울었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교실에서 하나 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홀로 교실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