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by 감상자

카페에 앉아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은민의 손을 잡고 있었고, 때로는 그녀의 얼굴을, 때로는 철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변화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에는 그저 얼굴 전체를 보며 마치 눈을 보는 것 같은 시늉을 했었고, 지금은 제대로 두 눈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철홍을 볼 때는 철홍의 눈을, 은민을 볼 때는 은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탐색만 할 뿐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의 제안으로 이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음에도 침묵만이 이어졌다. 먼저 말을 해야 할까 싶었지만, 어떤 말이 적절한지, 왜 그곳에 모여야만 했는지, 서로가 필요로 하는 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주어진 주제가 있다면 그에 걸맞은 말을 꺼낼 텐데, 아무런 주제도 없는 듯한 상황에서 침묵이 주제라고 생각될 만큼, 아니 침묵이 당연한 상황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침묵을 끊어달라고 바라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은 계속됐고,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는, 계속되는 물음만 입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끝을 철홍의 목소리로 맞이하게 됐다.


“너무 위험했어.”


짧고 간결한 그의 목소리는 이전에 있었던 약간의 흥분도, 어딘가 따스했던 느낌도, 장난기 가득한 분위기도 없었다. 다급하게 울어대던 기계 뒤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그때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 걱정과 안도가 함께 뒤섞여있었지만, 화가 난듯한 상태였다.


“물론. 물론 내가 상기 도와주려고, 강제로 엘베 멈춘 건 맞는데, 안전이 정확히 확보된 것도 아니고, 수리기사가 수리 중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걸 강제로 열어서 은민이 내보내고 그랬어야 됐어?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은민이가 나가는 중에 떨어졌으면? 제동 장치가 제대로 작동 안 해서 그대로 떨어졌으면? 그런 걱정은 하나도 안 했어? 씨발 그런 생각은 나 혼자 하고, 나만 긴장했어?”


이렇게까지 속사포처럼 말하는 철홍의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던 때는 도움닫기를 위한 준비 시간이었던 것처럼, 아주 빠르게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말에는 욕설이 섞여 있었지만, 누군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분노의 표출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이 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미안해.”


그저 짧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그의 눈을 보고 제대로 사과하는 이 말이 전부였다. 그것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도 아닌, 결국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작은 시위성 말도 아닌, 걱정을 해준 것에 대한,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준 것에 대한, 웃음으로 걱정을 감추려는 태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저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왼쪽 밑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됐다. 네가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은민이 생각해서 그랬을 거긴 한데. 그렇긴 한데. 진짜, 아 진짜.”


됐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했지만, 그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난처했다. 모든 상황은 처음이고, 어색했고, 어려웠다. 그럴수록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왼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은민이 입을 열었다.


“나도 미안해. 내가 괜히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네.”


힘이 들어간 왼손을 느껴서인지, 철홍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서인지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리고 철홍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그의 눈에는 아까의 분노가 남아있었지만, 분명 옅어져 있었다.


“내가 난처하다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을 못한 것 같아. 나름의 위기라고만 생각하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 못했어.”


그녀의 말이 나의 속마음을 일부 대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끝까지 은민이만 생각했다. 철홍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고려하지 못했고, 그 상황을 지켜보는 철홍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거기까지 미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눈앞의 일에만 신경 썼고, 이후에 벌어질 상황들도 당연하다는 듯 철홍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있었음에도, 철홍이 그것을 조용히 만들었다. 철홍에게 또 감사할 것이 생겼다. 기회를 준 것도, 해결한 것도 전부 철홍이었다.


“고맙고, 미안해.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고, 문제가 커지지 않게 해 준 것도 고마워. 그리고 걱정 끼쳐서 미안해.”


친구라는 관계,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에 어느 순간 너무 물들어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행동이, 그가 주는 것들이, 너무 쉽게 여겨졌고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것 같다. 나의 이기적임에, 생각 없음에 또다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했나 봐. 네가 날 도와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귀찮은 일이기도 할 텐데 너무 고맙고, 미안해.”


계속해서 사과하고 고마움을 느끼고, 또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만이 답인 것처럼 나는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화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다. 얼마나 이 말들을 반복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었다. 그가 행동으로 보여준 것에 비하면, 말만 내뱉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 말 등 모든 것에 감사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그렇게 끝이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할 것 같던 상황을 마무리해 주는 것은 역시나 철홍이었다.


“뭐래 미친놈이. 도와주는 건 개 쉬움. 뒤처리는 좀 귀찮긴 했는데, 그 정도는 이 형한테 아무것도 아니지.”


드디어 제대로 웃으며 말하는 철홍은 아까까지의 분노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의 눈을 통해 안도할 수 있었고, 이렇게 쉽게 용서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이런 상황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려는 의도였을까. 그녀도 말을 거들었다.


“이제 화 풀린 거지? 아, 나 오늘 학원도 빼먹었다고. 너무 놀라서 수업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 뭐 놀란 건 맞는데, 그냥 뭐.”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이런 노력을 해 준 은민과 철홍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확실히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 용기라는 이름의, 한 발자국이라는 슈퍼 히어로의 능력 때문인 것 같았다.


“난 근데 아까 깜짝 놀랐다. 강상기 결단력 뭐임? 행동력이 아주. 문 살짝 열리자마자 은민이 올리고, 좀 대단하던데? 그런 상황에서 그런 판단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사실이었다. 이전의 나라면 우물쭈물거리고, 말을 더듬으며, 누군가 해결해 주겠지 혹은 투명 인간이 돼서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기를 바라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움직였고, 위기 상황이 있을 수 있었지만 결국 잘 해결됐고, 든든한 친구와 애정 가득한 연인에 대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너희들한테 할 말이 있어. 별건 아니고, 그냥 음, 어떻게 보면 나의 능력이지. 일종의 슈퍼 히어로의 능력?”


나의 말이 궁금증을 유발했을까? 둘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고, 무슨 말이 이어질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모두 바라보았지만, 둘은 같은 눈처럼 보였다. 어쩌면 능력이라는 그 말이 둘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둘의 눈은 어서 다음 말을 이어가라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전에 일종의 투명 인간이었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내 의사는 전혀 없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 같았어. 그래서 더 이상 살아가는 의미? 그런 게 없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이전에 느꼈던 속마음을, 투명 인간이던 때의 나를, 보잘것없고 가치 없던 때의 나를, 다시 태어난 뒤에도 또다시 투명 인간이 될 뻔했던 나를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말 끝에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어떻게 나를 대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솔직해지고 싶었고, 제대로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친구에 대한, 연인에 대한 최대의 예의일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쇠창살을 뜯어냈고, 딱 한 발자국이라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갔어. 그래 솔직히 죽을 생각이었어. 근데 살았고, 그러면서 용기라는 능력이 생겼던 것 같아.”


나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은 충격적인 고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그 말에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혹시나 나의 말을 누군가 가로채진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능력의 부차적인 효과인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키도 커지고 그렇더라고. 그래서인가, 뭐가 우선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더 용기를 냈던 거 같아. 그렇게 친구를 만들었고, 여자친구를 옆에 두게 됐어.”


나의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둘은 기꺼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가로채지도, 막지도 않고 묵묵히 들어주었다. 나의 독백은 계속되었다.


“근데 또 흔들리더라. 이전의 나로 돌아가려고 했어. 다시 투명 인간이 되려고 했어. 근데,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어. 예전에 너희 둘만 간신히 얼굴이 보이던 그때가 싫었어. 변화된 내가 좋았고, 간신히 얻은 것 같았고, 놓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더 용기를 냈고, 고작 한 발 정도 더 움직인 것 같아. 그게 내가 갖게 된 능력이야.”


길었던 투명 인간 생활을 최대한 짧게, 그렇지만 마음이 전달되도록 간추려보았다. 그리고 내뱉었다. 이 감각들이, 감정들이, 과거의 것들이, 그리고 지금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고, 알아주기를 원했다. 그에 대한 화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철홍이 다가왔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다. 그리고 나도 미안해. 또 대단해.”


은민은 잡고 있던 손에 나머지 손을 뻗었다. 그렇게 두 손으로 내 왼쪽 손을 쥐었다. 따스했고,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지만, 참고 있는 게 느껴졌다.


“힘들었겠다.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늦게 알아서 미안해. 그리고 괜한 투정 부려서 또 미안해. 그래도 앞으로 그런 선택하지 마.”


조금은 울먹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그래. 앞으로 우리가 또 싸울 수도 있고,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어. 근데 그때는 내가 먼저 말 걸게. 혹시 내가 조금 늦어져도, 먼저 말 걸어줘. 우리 친구잖아. 맞지?”


지금까지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단연 최고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가장 기쁘다고. 그런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어쩌면 지금까지 중에 가장 환하게 웃고 있을 입모양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 웃음소리만 울려 퍼질 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의 손에 그녀의 손이 느껴졌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것은 갑자기 생긴 능력에 대한, 뜻하지 않게 얻게 된 친구와 연인이 생긴 것에 작은 부작용일 것이다. 지나갈 것이고, 그 뒤에 나는 지금까지처럼 행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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